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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Why] 신김치 맛에 채소가 익어갈수록 매콤… 땀이 '송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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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망원동 '현정이네 철판두루치기'

조선일보

정동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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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에서도 얼큰한 냄새가 났다. 신호를 받은 위장이 요동쳤다. '배가 고프다'는 감각이 이성을 지배했다. 불 꺼진 망원동 뒷골목은 좁고 어두웠지만 젊었다. 홍대 거리에서 밀려난 젊은이들은 지하철역에서 한참 걸어야 하는 망원동 어귀를 서성였다. 작은 식당들도 그들과 같은 처지였다. 목 좋은 역세권은 넘볼 수 없는 사치다. 실력으로 칼 갈고 친절함으로 뒷심 기른 집들은 늦은 밤에도 문을 열고 객을 기다린다. 오후 4시에 문 열어 새벽 2시까지 영업하는 '현정이네 철판두루치기'는 그중에서도 발군이다.

"이제 망원동 온 지 2년 좀 넘었나? 4월이니까, 2년 4개월 됐네요." "언제 문을 열었느냐"고 지나가는 투로 물은 말에도 주인장은 귀찮은 듯 빠르게 해치워버리지 않고 한마디 한마디 주의 깊게 답했다. 원래 경기도 양평에서 장사했고 그때도 집은 망원동이었다고 했다. 긴 출퇴근을 3년 정도 하다 망원동으로 온 것이었다. 먼 곳을 돌아온 이 집 메뉴는 2인분에 2만3000원인 철판두루치기<사진>뿐이다. 오리와 돼지 목살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저희 집은 오리가 전문입니다. 오리 못 드시는 분들이 있어서 돼지고기를 추가했습니다." 주인장 설명에 선택은 당연히 오리였다. 그다음은 매운 정도를 골라야 한다. 다섯 단계가 있는데 짬뽕 정도는 기본, 매운맛을 좋아하면 2단계를 고르라고 했다. 괜한 자존심에 "2단계요" 하고 답했다. 주인장이 큰 양푼에 담긴 빨간 두루치기를 테이블 가운데 박힌 직사각형 철제 틀에 부은 것은 10여분 뒤였다.

"먼저 우동부터 드시고 그다음에 채소, 고기를 드시면 됩니다. 불 조절은 저희가 해 드릴게요." 주인장은 저음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사리를 추가했다. 주인 설명이 또 이어졌다. "스지를 넣으면 국물이 걸죽해지고 새우를 넣으면 국물이 달아집니다. 전복은 전복이죠. 원래 이런 설명을 안 했어요. 더 팔려고 수작하는 것 같아서. 그래도 알려드리면 좋을 것 같아 다시 해드리고 있습니다."

출출한 탓에 묵직한 스지를 골랐다. 이미 끓여 낸 국물은 얼마 안 돼 보글거리며 김을 냈다. 틀이 넓으니 열 받는 면적이 늘어나고 덕분에 국물이 빠르게 졸아들었다. 국물에서 시큰한 기운이 치고 올라왔다. 서울식으로 깔끔하게 묵은 신김치 맛이었다. 하얀 우동면을 건져 먹으며 시간을 들였다. 채소가 익어갈수록 국물 단맛이 진해졌다. 설명대로 고기는 연해져서 먹기가 한결 편했다. 매콤한 맛에 이마에서 땀이 났다. 그러나 불쾌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오래 묵은 스트레스마저 풀리는 것 같았다. 고기와 채소를 건지고 자작하게 남은 국물에 부추볶음밥(2000원)을 볶아 먹으니 배가 터질 듯했다. 기어코 볶음밥까지 해치우고 계산하며 미뤄둔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가게 이름의 '현정이'가 사모님 되시나요?" 키가 크고 단발에 얼굴이 하얀 주방의 미인은 예상대로 주인장의 아내였다. 그리고 모델처럼 훤칠한 종업원은 아들이었다. "아드님이 사모님을 닮아 미남이에요." 우리는 입을 모아 모자(母子)의 외모를 칭찬했다. 주인장은 쑥스러워하며 농을 던졌다. "그러니까 저는 별로란 말씀이시죠." 그날 깜빡하고 건네지 못한 말은 다음과 같다. 비록 머리숱은 적지만 사장님도 잘생기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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