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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기고] GATT 가입 50년, 한국의 갈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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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올해는 한국이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은 1967년 4월 14일 세계무역기구(WTO)의 기반인 GATT에 가입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경제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던 한국은 GATT의 다자무역체제에서 다른 나라의 개방된 시장을 이용함으로써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GATT의 시장경제질서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체제를 수용해 시장 중심의 경제철학을 실행할 수 있었다.

한국은 GATT 가입 후 무역 규모 세계 10위권의 통상국가로 발전하였고, 이 점에서 한국의 GATT 가입은 광복 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 1967년 GATT에 가입하기 전인 1950년대 초 진작에 GATT에 가입할 기회가 있었던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6·25전쟁 중인 1950년 9월 당시 주영 공사가 한국 대표로 GATT의 제3차 다자무역협상인 토키(Torquay)라운드에 참석하였다. 토키라운드에서 한국의 GATT 가입에 대해 당시 협정 체결국 34개 중 25개국이 동의해 가입요건을 충족했다.

당시 한국의 GATT 가입 조건은 지극히 간략했다. 전쟁 중인 한국에 대한 체약국들의 동정이 집중됐고, 어려운 상황에서 정부 대표를 파견한 데 대해 체약국들의 많은 호평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키의정서의 서명일은 1951년 4월 21일이었는데 서명 기한이 여러 번 연장되었지만, 전쟁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한국은 1953년 8월까지 동 의정서를 서명하지 못했고 결국 GATT 가입이 무산되었다.

1948년 GATT 발효 직후 한국이 GATT에 가입할 기회를 가졌던 것은 미국이 서독, 일본과 함께 한국의 GATT 가입을 적극 지원했고, 한국 정부도 일본보다는 먼저 GATT에 가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토키라운드에서 GATT에 가입할 수 있었던 사정은 1951년 9월부터 10월까지 제네바에서 개최된 체약국단 제6차 회기에 참석한 당시 전규홍 주프랑스 공사가 1952년 2월 제출한 'GATT 회의에 관한 복명서'에서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6·25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가 GATT 및 한국의 GATT 가입 필요성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만약 한국이 토키의정서에 서명해 1950년대 초반 GATT에 가입하였다면, 한국은 GATT의 시장경제질서를 보다 일찍 수용하고, 한국을 원조하는 입장에 있던 대부분 체약국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보다 빠르게 전후 복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GATT 가입 50주년을 맞은 지금 국내외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WTO 체제에서 한국과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공유한 중국과는 사드 문제로, 우방인 미국의 새 행정부와는 미국 우선의 통상질서 재편과 관련하여 위기를 맞고 있다. 국민총소득 대비 수출입 비중이 80%를 차지하는 한국에 국가경제의 생존에 직결되는 통상관계의 위기는 기필코 극복해내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위기 극복의 DNA가 있다. 이는 6·25전쟁 중에도 GATT에 가입하려 했던 노력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통상의 원천은 국가 간 경쟁력의 차이인 점에서, 한국 정부와 산업은 물론 학계도 큰 그림에서 국제 경쟁력을 꾸준히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앞으로 50년 후에 GATT 가입 100주년을 기념할 후세대가 그전 50년 동안 무엇을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지 지금의 우리는 고민하고 슬기롭게 행동해야 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박노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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