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붓다의 탄생 장면 새겨진
마야데비 사원 속 희미한 부조
그녀가 잡았던 ‘무우수(無憂樹)’는
왕자가 장차 체득하게 될 깨달음
마야 데비 사원 안에 새겨놓은 마야 부인의 출산 모습. 1700년 전 이 부조가 새겨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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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왕비 마야가 잡았다는 나무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 나무의 이름이 ‘무우수(無憂樹)’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겁고 수고로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32절)라고 말했다. 룸비니의 아소카 나무도 그런 희망을 건넨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로운 날들을 버티고 있는 우리에게 ‘걱정이 없는 삶, 걱정이 없는 나라’를 제시한다.
사원 안 부조 앞에 서서 그 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왕비와 머리 위의 나무와 태어나는 아기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나는 무우수 일화가 왕자가 앞으로 체득할 ‘깨달음의 나라’를 암시한다고 본다. 걱정이 없는 자리, 번뇌를 여읜 자리. 실제 역사 속에서 출산 중인 왕비가 그 나무를 잡았든, 잡지 않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마야 데비 사원 내부는 다소 어두웠다. 바닥을 통해 사원을 짓기 전 유적을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순례객들이 줄을 서서 마야 부인의 출산 모습을 새긴 부조와 땅바닥의 마커 스톤을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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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데비 사원 안 붓다가 태어난 자리에 2200년 전 아소카왕 때 표시했다는 마커 스톤. 유리관 위로 순례객들이 떨어뜨린 꽃잎들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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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반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부족 연맹체적인 고조선 사회였다. 청동기와 철기 문화가 보급되고, 100년이 더 지나면 북만주에 부여,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가 형성될 시기였다. 이들 부족국가들은 대부분 하늘에 제를 지내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 왕자가 일곱 걸음을 뗄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올라와 받쳤다고 한다. |
룸비니 동산에 세워져 있는 아기 붓다상.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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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따진다. “아니, 어떻게 갓난 아기가 걸을 수가 있나. 그것도 일곱 걸음씩이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니.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건가.” “이건 너무나 독선적이다. ‘둘이 아님(不二)’을 설파한 붓다가 어떻게 이렇게 오만한 선언을 할 수가 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판한다.
불교 성지인 룸비니 동산에는 사원과 탑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상당한 규모의 사원이 옛날 이곳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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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붓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외친 뜻
왕비 마야가 사라수 나무를 붙들고 출산하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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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데비 사원 안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 아기 왕자가 둘러봤던 사방(四方)이다. 그건 막힘 없이 ‘툭!’ 터져 있는 우주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독선적 선언’이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쇼코처럼 “남들이 닿지 못하는 붓다의 경지가 최고”라는 풀이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만이 최고’ ‘붓다만이 진리’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나는 마야데비 사원을 나왔다. 룸비니의 바깥 풍경이 아름다웠다. 물음이 올라왔다. “실제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옹알이만 하는 신생아가 입을 열고 ‘천상천하’를 외쳤을까?” 물론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그저 지어낸 허구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과 울림이 도사리고 있다. 그 상징이 바로 이 일화의 존재 이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사람들은 대부분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달리 본다. 핵심은 ‘독존’이 아니라 ‘유아(唯我)’이다. 그럼 왜 ‘오직 나만이(唯我)’라고 했을까. 거기서 말하는 ‘나’는 대체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다.
아기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과연 독선적이고 오만한 선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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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나머지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일까. 우주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우주를 관통하는 걸까. 다름 아닌 ‘붓다의 정체성’이다. 그렇게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인공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아(唯我)’이다. 그러니 ‘유아(唯我)’의 나(我)는 작은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이 우주를 관통하는 오직 하나의 나다.
한국 선(禪)불교에서는 그렇게 큰 나를 ‘꽃’에 비유한다. 경허의 선맥을 잇는 만공(滿空·1871~1946) 선사는 그걸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불렀다. ‘세계는 한 송이 꽃/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만공은 그렇게 노래했다. 붓다는 우리에게 그 꽃을 보라고 말한다. 나와 우주를 동시에 관통하는 한 송이 꽃 말이다.
인도에서는 어렵지 않게 아소카 나무를 만날 수 있다. 잎이 화살처럼 뾰족하고, 붉은 꽃이 아름답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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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
붓다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예수에게도 그런 어록이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6절) 이 대목을 인용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다. 다른 곳에는 문이 없다. 예수를 통해야만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다. 천상천하 오로지 예수만이 존귀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보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궁금하다. 그런 예수는 오히려 ‘작은 예수’가 아닐까. 그건 유대인의 핏줄과 유대인의 육신을 갖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의 겉모습만 알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나’는 ‘신의 속성’이다. 그건 이 우주를 관통하며 ‘없이 계신 하느님’이다.
그러니 붓다가 말한 ‘나’도, 예수가 설한 ‘나’도 작은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작은 눈을 가진 우리가, 작은 가슴을 가진 우리가 자꾸만 그 구절을 작게 볼 따름이다.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 3000년 전에 벽돌로 건축을 하며 거대한 계획도시를 건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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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인도인은 무려 3000년 전에 벽돌을 구워서 집을 지었다. 집은 물론이고 거대한 규모의 계획도시까지 건설했다.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이 대표적이다. 계획도시 한가운데 도로가 나 있고, 커다란 수로도 설치돼 있었다. 인도는 그런 문명의 나라였다.
인더스 문명을 상징하는 모헨조다로 유적을 토대로 그린 당시 도시의 상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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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 동산에는 탑(스투파)들이 많이 서 있었다. 벽돌을 구워서 쌓은 탑이다. 지금은 탑의 밑둥만 둥그렇게 남아 있다. 그게 2200년 전에 세운 탑들이다. 한반도의 고조선 시대에 인도는 벽돌을 구워 탑을 세우고 건축을 했다. 그런 탑들의 둘레에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룸비니 동산에 남아 있는 스투파(탑)의 유적. 붓다의 탄생지에다 기원전 2세기에 세운 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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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에 바람이 불었다. 시원했다. 사원 맞은편의 아름드리 보리수가 마구 흔들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숱한 순례객들. 룸비니의 붓다는 그들을 향해 묻는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무엇이 숨 쉬고, 무엇이 노래하고,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 물음이 걱정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걱정의 나무를 키우며, 걱정의 나무를 붙들고 사는 우리의 가슴에 표창처럼 날아와 꽂혔다.
룸비니 동산을 찾아온 인도의 순례객들. 붓다의 탄생지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나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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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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