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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조한욱의 서양 사람] 원주민의 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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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이 이주한 뒤 원주민들이 겪었던 참화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벌어진 그와 비슷한 비극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한 탐험가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 목격한 서해안은 불모지여서 네덜란드는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제임스 쿡이 동해안을 탐사하고 난 뒤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했다. 감옥에 넘쳐나던 죄수들을 보내 식민지를 개척하던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뒤 죄수들을 보낼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영국의 함대가 이곳에 캠프를 세우고 깃발을 처음 꽂은 1788년 1월26일은 지금도 오스트레일리아의 건국기념일로 지켜지고 있다. 금광이 발견되고 점차 더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오면서 식민지 개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섬이라 할지라도 대륙으로 분류되는 그 광활한 땅을 제대로 착취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5만년 전부터 그곳에 거주해왔던 원주민들이 그 수요를 채웠다. 저항하던 원주민들에게는 때로 영국 왕실까지 묵인한 무차별 총격이 가해졌으나, 그에 대한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백인들에게 협력해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다. 거대한 목장을 만들어 이윤을 취하던 목장 소유주들은 급료를 현금이 아닌 술, 담배, 밀가루와 같은 현물로 지급했다. 술과 담배는 지금도 심각하게 위태로운 원주민들 건강 상태의 주범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의 필버라 지역에서 원주민 목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3년 이상 지속되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최장 기간의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사태가 종료된 뒤에도 많은 원주민들이 목장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이 파업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인권과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투쟁의 전환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들은 1946년 5월1일에 파업을 시작했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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