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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니체가 열광한 선배, 현대철학의 실험실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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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7세기 유럽이 매장하려던 철학자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들뢰즈…

현대철학자들에게 남긴 흔적 조명


한겨레

스피노자의 귀환
-현대철학과 함께 돌아온 사유의 혁명가
서동욱·진태원 엮음/민음사·3만원


철학자 질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자는 다양한 곳에서 살 수 있지만, 그 살아가는 방식은 은자, 유령, 여행자, 하숙생과 같다.” 유대교 교리와 어긋난 주장을 펴다 파문당하고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도 격리당한 채, 안경 렌즈 가는 일로 연명하다 폐병으로 숨진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는 들뢰즈의 정의에 꼭 들어맞는 철학자이다. 그는 안경알만 갈다 간 게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지성의 렌즈도 세공하고자 했다.

서동욱·진태원 두 철학연구자가 엮은 <스피노자의 귀환: 현대철학과 함께 돌아온 사유의 혁명가>는 17세기 유럽이 매장하고자 했던 철학자 스피노자가 어떻게 현대 철학의 중심인물로 화려하게 되살아났는지를,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라캉, 들뢰즈, 푸코, 바디우, 알튀세르, 네그리, 발리바르 등 현대철학자 10명에게 남아 있는 스피노자의 흔적을 통해 재조명한 글모음이다. 현대의 대표적 스피노자 연구자로 꼽히는 피에르프랑수아 모로와 앙드레 토젤 두 사람과의 대화도 책 말미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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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스피노자를 접한 뒤 “나에게 이런 선배가 있었다니!” 하고 찬탄했고,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자들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스피노자의 무엇이 이들을 사로잡았을까.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이 이원적인 게 아니라 단일하다는 의미에서 “신 즉 자연”이라고 말한다. 신은 모든 것에 내재해 있지, 초월하지 않는다. 신의 절대성, 초월성, 기적 등은 ‘선지자’들의 ‘상상’일 뿐이며, 이런 생각은 ‘부적합 관념’에 불과하다. 자연이 신과 동일하다면 악취, 부패, 추악, 기괴, 혼란, 죄악도 신의 완전성에 포함되는가. 스피노자는 “신에게는 완전성의 최고에서 최저까지 모든 창조의 자료가 결여되어 있지 않다”며, 인간의 척도로 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 즉 자연”이라는 명제와, 불완전성 또한 신의 완전성의 표현이라는 스피노자의 사유가 던진 충격은 지금까지도 서양 철학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등은 명시적으로 스피노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방법론을 공유함으로써 오늘날 스피노자의 귀환을 예비했다. 니체는 스피노자를 “은둔하는 병자”라고 조롱하며 그의 철학을 “폐결핵의 현상론”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스피노자로부터 자유의지와 목적론과 도덕적 세계질서 등에 대한 부정을 발견한 뒤 열광했다. 또 프로이트가 꿈과 무의식까지도 정신활동으로 본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유를 신의 사유의 표현으로 본 스피노자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스피노자를 현대철학의 토론장에 본격 소환한 이들은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철학자들이다. 자크 라캉은 박해망상과 과대망상에 대한 정신분석을 통해 ‘인격’을 연구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광기는 사유의 한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스피노자를 주요 준거틀 가운데 하나로 삼은 라캉의 이런 결론은, 불완전성조차 ‘신 즉 자연’에 내포됨을 말한 스피노자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초월적 세계만이 진정하고 우월한 것이며 차안의 세계는 열등하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사상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 들뢰즈의 사유 또한, “모든 존재는 한 가지 뜻으로만 말해진다”는 스피노자의 ‘존재의 일의성’에 빚을 지고 있다. 들뢰즈와 달리 스피노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한 알랭 바디우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총체성의 철학’이라고 규정하며, 스피노자의 사유는 “어떻게 무한에서 유한이 나오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바디우와 스피노자는, 진리를 위협하는 ‘상상’ 혹은 ‘지식’에 맞선 “전투적 합리주의자”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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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철학연구자


스피노자의 사유를 흡수한 현대 유럽철학을 일별한 이 기획은 여러 필자들이 참여하였음에도 매우 짜임새 있고, 글들은 서로 보완적이다. 인간의 연구가 원숭이에 대한 이해를 돕듯, 이 기획을 읽으며 독자들의 스피노자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앞으로의 작업으로, 스피노자의 귀환에 관한 논의가 현대 유럽철학의 영토를 과감히 넘어설 것을 기대해본다. 가령 스피노자의 사유는,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道法自然)고 한 노자나, “똥에도 도가 있다”고 한 장자의 사유와 대화해볼 여지가 풍부하며, 세계에 내재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해 ‘포통’(包通)이란 말을 만들어낸 왕필의 사유와도 교유할 점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단순한 비교철학을 넘어 내재적 사유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다.

이상수 철학연구자·서울시교육청 대변인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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