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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청춘직설] 허균 ‘먹방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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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며, 먹는다는 것은 더구나 한 몸이 살아가는 데 관련된다. 선현이 음식을 천하게 볼 때는 먹기에만 빠져 저 좋은 것만 추구하는 태도를 지적한 것이다. 어찌 음식을 제쳐 두고 음식 얘기는 하지도 말라는 뜻이겠는가(食色性也, 而食尤軀命之關. 先賢以飮食爲賤者, 指其도而徇利也. 何嘗廢食而不談乎)?”

허균(許筠·1569~1618)이 <도문대작>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부친 한 문단이 이렇다. <도문대작>은, 조금 과장을 보태 ‘먹방’에 가까운 조선의 음식 이야기다. 먹방 시작에 앞서 체면을 차려 보겠다는 고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러고도 맨 앞 문단은 어려서는 아버지 덕분에, 장가가서는 처가 덕분에 귀하고 맛난 음식을 얼마든지 먹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와 추억으로 채웠다. 조선 시대 교양의 잣대로 보면 방정맞은 글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 글은 글쓴이의 처지가 어렵고도 궁색할 즈음에 태어났다.

허균은 1610년 12월 전라도 함열로 귀양살이를 떠난다. 그해 11월 내내 허균을 괴롭힌 별시의 부정 합격자 문제가 끝내 탄핵과 파직에 이어 유배에 이른 것이다. 이해 조정은 선조의 신위를 종묘에 옮기고 별시를 치렀다. 허균은 그때 이항복, 이덕형, 이정귀 등과 함께 최종 시험을 감독했다.

문제는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자 불거졌다. 허균이 조카와 형의 사위를 부정 합격시켰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 뒤로 한 달에 걸쳐 허균에 대한 ‘모욕 주기’가 이어졌다. 사관 또한 허균의 억울함을 암시하는 기록을 실록에 남겼으나 허균은 별수가 없었다. 한겨울에 귀양길에 오른 허균은 이듬해인 1611년 1월15일 함열에 가 닿는다. 그런 중에도 허균은 딴짓을 했다.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먹는 타령이었다. 예컨대 벗 기윤헌에게 유배지 도착을 알리느라 쓴 짧은 편지를 보면, 도착했다는 말 빼고는 이 내용이 전부다.

“새우도 부안 것만 못하고, 게도 벽제 것만 못해. 음식을 탐하는 사람으로서 굶어 죽을 판이야.”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함열현감으로부터 연어알젓을 받아 잘만 먹어치우고 나서도 다음날 바로 먹을거리를 가지고 불평했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가는 뱅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들 하기에 여기로 유배 오기 바랐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는 일절 나지 않으니 또한 제 운수가 사납습니다.”

불평 끝에, 허균은 기억 속에서 음식을 불러내고, 상상으로 미각을 되살렸다. 먹어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취향과 기호가 분명하기에, 허균은 먹는 타령을 해도 조리가 있었다. <도문대작>은 마냥 “먹고 싶다”, “최고예요!”가 아니다. 재료는 산지별로 정리했고, 만드는 과정의 급소가 드러나며, 일품요리에서 간식과 요즘의 별미 음료와 과자까지 아울렀다. 조리서 빼고, 조선 시대에 음식을 단일 주제로 해 본격적으로 음식을 다룬 글이 이렇게 태어났다. 글쓴이로서는 괴롭고 궁핍한 즈음의 글이다.

‘도문대작’이라는 말은 유비, 손권과 함께 천하를 다툰 조조(曹操)의 셋째 아들이자 위나라의 대표적인 문인 조식(曹植)의 문장에서 왔다. 조식은 “푸줏간을 지나며 크게 입 벌려 씹는 시늉을 함은, 비록 고기는 못 먹었어도 바로 이 순간이 귀하고 더구나 유쾌해서다(過屠門而大嚼, 雖不得肉, 貴且快意)”라고 했다. 조식의 시대에 “고기 맛 좋은 줄 알면 푸줏간 문 앞에서 고기 씹는 시늉을 한다(知肉味美,則對屠門而大嚼)”라는 유행어도 있었다.

<도문대작>과 ‘도문대작’을 앞에 두니 각박한 처지를 스스로 위로하고픈 허균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아울러 5월 숨 가쁜 달력이 새삼스럽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이어진다. 초파일에 임시 공휴일까지 끼고, 연휴가 길어질 수도 있다. 미어터질 곳은 음식점일 테다. 내 이웃, 골목길 장삼이사들, 벌써 5월을 바라 맛집 검색에 들어갔으리라. 아름다운 5월 첫 주에 모두들 부디 좋은 음식을 들기 바란다. 단, 검색 말고, 텔레비전 먹방과 유명하다는 맛집 사냥꾼 말고, 내 일상과 내 추억에서 우러난 저마다의 도문대작을 펼쳤으면 좋겠다. 고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검색에 등 떠밀려 유명하다는 푸줏간 앞에 줄 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우리 부모·자식, 형제자매, 사제, 도반, 동지 사이, 그리고 소중한 휴일을 얼마든지 함께할 친구, 연인 사이는 검색의 결과가 아니다. 뜬 세상에서 먹방도 쓸 데가 있으리라. 다만 추억은 잊지 말자.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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