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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임의진의 시골편지] 저녁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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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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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이 높아 오후 네다섯 시쯤 되면 산그늘이 집을 덮친다. 오래도록 석양을 즐기고 싶으나 그러려면 앞산을 삽으로 떠다 옮기든지 멀리 서해안 어디께로 이사를 가야 한다. 포기하고 이른 저녁을 받아들였더니 저녁과 밤이 없이는 이제 심심해서도 못살겠어라.

비바람이 치는 추운 밤이나 이슥한 어둠 속에서 차라도 한잔 마시려면 난롯불을 꺼트리지 말아야 한다. 이불도 여태 두툼한 솜이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무언가 묵직한 걸 덮어줘야 잠버릇도 온순하고 감기도 모르고 살게 된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집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지낸다는데 산촌에서 그러다간 딱 얼어 죽는다. 개멋보다는 내복을 챙겨 입으며 살 궁리를 앞세우게 된다.

나는 아침보다 저녁이 배나 반갑고 감사하더라. 머리가 개운해지고 가슴이 진정되어 차분해지는 건 대개 저녁시간이다. 주변이 좀 어두컴컴해져야 안정감이 들고 심장조차 고르게 쿵쾅거린다. 해가 서산에 떨어지면 밖에 널어둔 빨래를 거두고 내일쯤 무슨 꽃이 필지 꽃밭을 살펴보기도 한다. 할미꽃과 튤립, 은방울꽃, 꼬마장미가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날마다 파티 중이다. 침침한 조명 아래 미인들이 많아 보이듯 저녁때쯤의 꽃들은 배나 눈부신 황홀경이다. 가물 때 물을 주고 고랑을 살펴주면 은혜에 반드시 이렇게 보답들을 한다. 받은 은혜를 까먹고 능글능글한,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하고는 질적으로 성질이 다르다. 식물은 정직하고 분명해서 정성과 사랑을 나눈 만큼 열매와 꽃으로 갚아주는 선량한 친구들이다.

날마다 나는 저녁을 기다린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 저녁이지만 특별히 기다리기 때문에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악단이 때에 맞춰 연주를 시작하듯 개구리와 풀벌레들이 열창하기 시작한다. 내가 침묵할 때 또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이 된다. 단순하고 여유로운 삶이여. 18세기 퀘이커 교인들은 단순하게 살라면서 이처럼 찬미했단다. “단순하게 사는 것이 축복이라네. 자유롭게 되는 것이 축복이라네. 몸을 누여 쉴 만한 밤이 되니 축복이어라. 당신이 매일 찾아가는 집이 바로 사랑과 기쁨의 골짜기라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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