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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세상 읽기] 대선 ‘공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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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대통령 선거의 공약이 만발하는 가운데, 이를 대하는 태도도 각양각색이다. 그동안 내가 본 네 가지 반응 유형은 이렇다.

첫째는 무관심형. 왜 관심이 없느냐고 무작정 공박하기도 어려운 것이, 나름 합리적 이유를 대는 사람도 많다. 가장 설득력 있는 명분은 공약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는 ‘무용론’. 언제는 공약이 시원찮아 대통령 노릇을 잘못했느냐고 반박하면, 바로 대답하기 어렵다.

합리적인 것은 여기까지, 공약 무용론이 근거 없는 확신과 결합하면 어떤 그럴싸한 약속이나 계획도 이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믿음’ 없는 정치가 어디 있을까만, 공약을 무력하게 하는 확신이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일차적 관계거나 인상(이미지)이라는 것이 문제다.

둘째, 평론가형. 공약에 관심은 있되 제삼자처럼 중립 위치를 지키려 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나, 양비론 아니면 양시론을 펴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공약이든 평론의 잣대를 흠 없이 통과할 수는 없으니, 이 후보나 저 후보나 다를 바 없다는 ‘무차별성’ 주장으로 빠지기 쉽다.

중립이라고 강변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판단을 숨기는 것도 불편하다. 돈이 많이 드는데도 재원 계획이 부실한 공약이라고 평론하는 행간에는 흔히 복지 확대와 증세를 반대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중립을 주장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관찰자다.

셋째, 소비자형. 나름대로 공약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한다. 어느 정도는 좋고 싫음을 가르고 선택하는 점도 평론가와는 다르다. 후보와 정당이 공약이라는 상품을 내놓으면, 우리는 ‘가성비’가 가장 좋은 것을 고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생산되지 않은 상품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 문제다. 소득 불평등과 비정규 노동, 흙수저 논란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알맞은 공약을 찾아보기 어렵다. 합리적 소비자 노릇이라 해봐야, 진열된 상품 중에 그나마 엇비슷한 것으로 고를 수밖에.

마지막이 참여형이다. 이들은 공약을 알고 평가할 뿐 아니라 이미 나와 있는 공약에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한다. 잘못을 고치라고 따지고, 있어야 할 것이 빠졌으면 새로 넣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이들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권자이자 유권자지만, 수가 적어 몇 사람 보지 못했다.

참여는 좋은 공약을 만드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당선된 후보가 나중에라도 그 약속을 지키게 감시하고 압박하는 데에 이만한 수단이 없으니, 다음 선거 때문에도 공약을 지킬 가능성이 더 크다. 그뿐인가, 현실 조건이 어렵고 저항이 있더라도 참여와 지지가 강하면 공약을 실현하기 쉽다. 몇조원이 더 들어가는 아동수당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까, 재정 계획을 같이 논의하면 실현 가능성이 더 커진다. 공약(公約)은 ‘공약’(共約)일 때 힘이 더 강하다.

나는 마지막 유형처럼 행동하는 것이 민주공화국 국민의 권리이자 책임이라 믿지만, 한참 뒤에나 다수가 될 것이니 아직은 희망하는 것에 머문다. 한 가지, 비현실적이라고 지금 공약의 처지에 만족하고 안심할 수는 없다. 공약이 ‘공약’(空約)이 될수록 앞의 세 가지 유형이 많아지고 악순환이 생긴다는 것이 영 맘에 걸려서다.

이제 무슨 수로 바꿀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문자를 보내거나 정당에 전화라도 걸자. 이런 공약은 이렇게 바꿔라! 따지고 요구하자. 차선의 정책과 정부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기회는 아직 남았다고 생각한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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