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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기고]박정희·박근혜 체제의 유산 보안관찰, 이제는 끝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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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진료를 마칠 때쯤이다. 두 남자가 병원에 들어선다.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긴급체포합니다!” 의사는 영장 제시를 요구했다. 사복 경찰 한명이 진료실을 지키고 다른 한명이 나가더니 팩스로 뽑은 체포영장을 제시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적 근거 없이 누군가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체포할 수 없다. 사본인 팩스 영장으로 체포하는 것은 위법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를 종로서로 데려가 5시간 조사했다. 2016년 12월에 벌어진 일이다. 전국의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과 민주주의가 한참 외쳐지던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그전에도 경찰은 수시로 직장과 학교, 동네에 불쑥 찾아와서 그를 관찰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주변사람에게 물어봤다.

경향신문

그는 23세 때인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조작사건으로 14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강용주씨다. 현재 의사인 그는 보안관찰처분대상자이다.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안감호’와 ‘보호관찰’로 시행되다가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고 보안관찰법이 대체 제정되면서 ‘보안관찰’로 바뀌었다. 국가보안법·군형법 위반 등의 혐의로 3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을 ‘보안관찰처분 대상’으로 규정하고 2년마다 갱신 여부를 결정한다. 보안관찰법의 뿌리는 일제다. 항일운동가를 잡아들이기 위해 요시찰인물을 감시하도록 규정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이 1936년 시행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걸 바탕으로 1975년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전향을 거부한 사상범들이 형기를 다 채운 뒤에도 수십 년 동안 ‘보안감호처분’을 내렸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인권침해적인 사회안전법은 폐지됐으나 이 법의 기능중 하나인 보안관찰은 유지되고 있다.

보안관찰의 근거는 과거범죄에 대한 ‘재범 위험’ 예방인데 감시해서 ‘내심의 반사회성’을 추정·판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양심’을 외부에서 추정·판단하고 처벌하는 것은 헌법 19조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다. 보안관찰처분대상자가 실정법을 위반하지 않아도 경찰이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추정해서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국가가 그의 내심을 추정하기 위해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는 3개월마다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어디로 여행을 가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뿐 아니라 일상적 감시로서 주변의 동료나 이웃들에게 범죄자로 낙인찍히게 함으로써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게 하는 이중처벌이다. 게다가 보안관찰처분 결정과 집행 취소를 사법부가 아닌 행정기관이 담당하고 있으며, 기간제한 없이 갱신할 수 있다. 강씨는 18년째 보안관찰법에 저항 중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가 당한 조작간첩사건의 재범을 막으려면 피해자를 감시할 일이 아니라 국가정보원 등 공안기구의 권한남용을 통제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1992년부터 유엔인권기구가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폐지하라고 수없이 권고한 법이다. 그는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도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향제도를 거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인권침해적인 보안관찰의 신고의무를 불복종하는 건 자연스럽다. 게다가 그는 트라우마센터장 등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만약 그가 위법한 일을 한다면 그때 그 ‘행위’를 처벌하면 된다.

헌법을 위반한 박근혜를 파면시키고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지만 불행히도 아직 우리 사회는 19세기에 머물러 있다. 일제시대 창안되고 박정희 독재시절 법으로 제정된 보안관찰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박근혜 체제를 넘어서자는 건 친일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반민주적인 제도와 관행을 없애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후보들은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정책을 고민하기보다는 철지난 ‘안보장사’로 표를 얻기에 급급하다. 결국 믿을 것은 우리의 실천이다. 시민의 손으로 민주주의와 헌법을 유린한 대통령을 쫓아냈듯이 이번에도 시민들이 나섰다. 여기저기서 ‘내가 강용주다’라는 선언과 보안관찰법 위헌제청심판을 촉구하고 있다. 오는 28일 강씨의 보안관찰법 위반에 대한 재판이 열린다. 부디 재판부는 강씨 사건에 대한 위헌제청요구를 수용하길 바란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의 편에 섰듯이!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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