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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2030 세상/원지수]그래서, 뭐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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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동아일보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2000년대 예능 프로그램에 ‘당연하지’ 게임과 쌍벽을 이루던 ‘단어 말하게 하기’ 게임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말해야 하는 단어가 ‘짜증 나!’일 경우, 답은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최선을 다해 짜증 나게 해 그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통 원하는 답을 정확히 듣기란 쉽지 않기에 벌어지는 별의별 희한한 상황들이 이 게임의 포인트다. 그런데 만일, 그 게임판이 직장이고 답이 “그래서 뭐 할 건데?”라면 99% 이 답을 나오게 하는 말이 있다. “저, 퇴사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첫 회사를 나올 때, 1000번의 되새김질 끝에 가까스로 내뱉은 “저 이직합니다”라는 말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축하해!” “대단한 걸?” “야 인마!!!!”. 하지만 짧은 감탄사 뒤에 모두가 묻는 것은 한가지였다. “그래서 뭐 하려고 해?”

이직, 퇴사, 휴직, 유학 등의 결정에 반드시 따라오는 이 질문을 직장 언어로 번역하면 “그 결정, 어디다 쓸 건데?” 정도가 된다. 이제부터는 좀 본격적으로 달릴 태세를 갖춰야 마땅할 서른 전후의 직장인이 퇴사한다는 것은 이후의 삶에 반드시 ‘쓸 데 있는’ 것이어야만 하고, 유학을 간다면 다녀온 후에 기필코 써먹을 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저 취직하려고요”라는 말에 “취직해서 뭐 하려고?”라고 묻지 않는다. “저 결혼합니다”도 마찬가지. 입시, 취업, 결혼, 출산으로 이어지는 ‘모두의 궤도’를 이탈하려는 발걸음에 대해서만 유독 그 효용을 따지고 ‘그 다음’을 묻는다.

아직 명함도 안 나온 새 직장에 가서 내가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가 보기 전에 미리 알 수 있는 걸까. 앞으로에 대한 물음을 품고 떠나는 유학길에서 내가 어떤 나름의 답을 찾아올 수 있을까. 나는 그때 내가 하려는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얼마나 많은 밤을 후회로 땅을 칠 것인지, 내 10년 후, 20년 후 커리어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수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통해 그것이 그 순간 최선이라는 것만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계획한 대로 안 되는 게 원래 인생이라지만 지금의 세상은 계획을 한다는 것조차도 사치가 되었다. 워낙에 하루가 다르고 매일이 바쁘다. ‘나의 계획된 다음’에 대한 모범 답변을 갖고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해 봐야 알 것 같아요”라는 한마디로 질문자를 실망시켰다. 만일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됐어?”라든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를 물었더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할 말이 참 많았는데….

사실 그건 남의 인생살이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혹은 어색해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더더욱 굳이 멋들어진 답안지를 내놓을 필요도, 없는 계획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뺄 필요도 없다. 내가 그 선택을 하기 위해 1000번을 흔들렸다면, 어른은 되지 못할지언정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나 스스로 짊어질 마음의 준비는 된 것이니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무릉도원을 발견한 어부도, 하쿠나 마타타의 심바도, 모두 가던 길을 잃고 우연히 접어든 길에서 인생의 장면을 만났다. 20, 30대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선택한 길이 정확히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가 보지 않고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기회를 믿고 어쨌든 오늘의 한 발을 내딛는 것. 가던 길이 갑자기 땅으로 쑥 꺼지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솟아나도 “I’m fine” 하며 다시 새로운 길을 덤덤히 선택하는 것. 그러니 우리, 힘내서 길을 잃어 보자. “대체 뭐를 하려고 그러냐!”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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