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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배명복 칼럼] ‘송민순 회고록’ 바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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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 앞날 위해 남긴

외교관의 솔직한 기록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오독해

케케묵은 색깔론 재료로 삼은

수구 보수 진영의 꼼수

이제 더는 안 통해

중앙일보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세론’에 켜진 빨간불인가. 아니면 곧 잊히고 말 찻잔 속 태풍인가.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후보와 관련한 ‘송민순 회고록’ 파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전과 정책을 놓고 경쟁해야 할 대선후보 간 토론이 10년 전 과거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전 장관이 쓴 회고록에서 비롯된 논란으로 문 후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를 제외한 모든 후보로부터 날 선 공격을 받고 있다. 안보관에 이어 정직성까지 의심받는 상황에 몰리면서 그제 진행된 대선후보 2차 TV토론에서도 그는 십자포화의 표적이 됐다. 가뜩이나 답답하고 짜증 나는 대선후보 토론이 그 때문에 더 재미없어졌다는 불만이 나만 느끼는 불만일까.

지난해 출간한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송 전 장관이 밝힌 대로 2007년 11월,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에 찬성할지 기권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물어본 게 사실이라면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잘못이다. 특히 북한에 물어보자는 결정을 한 사람이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문 후보였다면 그의 대북관이나 안보관은 의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문 후보는 계속 말을 바꾸며 부인해 왔다. 처음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가 다음엔 문의가 아니라 통보라고 하더니 그다음엔 국정원을 통한 탐문이라고 해명했다. 안보관도 문제지만 거짓말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지난해 10월, JTBC의 태블릿PC 보도로 국정 농단 사태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탄핵 정국에 묻히면서 흐지부지됐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끝까지 묻혀 지나갈 것으로 생각했다면 순진하기 짝이 없다. 경쟁 진영 후보들이 이런 호재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특히 선거 때마다 불그죽죽한 색깔을 칠해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구 보수 입장에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최고의 호재였을 것이다.

불씨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에 대비해 마땅히 문재인 캠프는 명쾌한 논리와 확실한 반론을 준비해 놓고 있었어야 한다. 한창 훈풍이 돌던 당시의 남북관계를 감안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면 문제가 이토록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이 잘 안 난다느니,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다르다느니 하며 우물쭈물하다 여기까지 끌려온 셈이다.

중앙일보



송 전 장관은 2005년 역사적인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북한 핵이라는 난제 중의 난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외교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실과 소회를 정확하고 솔직하게 기록해 후세에 교훈을 남기겠다는 취지로 회고록을 집필했다. 남북관계와 무관하게 북한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문제에서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옳았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뜻으로 관련 대목을 서술했다.

문 후보가 민주당 대권주자가 될 것을 미리 상정하고 일부러 그를 공격하기 위해 북한 인권결의안 대목을 집어넣은 게 아니라는 것은 정상적 독해력을 갖고 책을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했던 당시 사례를 교훈 삼아 같은 실수는 하지 말자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수구 보수세력은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무슨 엄청난 ‘보물’이라도 건진 양 문제의 대목만 딱 떼어내 ‘문재인, 북한 내통 의혹’ 운운하며 그를 공격하는 재료로 삼았다. 송 전 장관이 가리키는 방향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본 꼴이다. 오독(誤讀)도 이만저만 오독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한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임명까지 주장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 마치 이 문제에 이번 대선의 운명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지지율 만회에 골몰하고 있는 국민의당도 가세했다. 그나마 합리적일 줄 알았던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도 다르지 않다. TV토론에서 그는 “거짓말로 드러나면 후보에서 사퇴할 용의가 있느냐”고 문 후보를 몰아붙였다. 게다가 그는 케케묵은 ‘주적론(主敵論)’으로 사상 검증 논란까지 불러일으켰다.

빨간색이라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걸핏하면 색깔론에 편승해 남을 공격하는 것은 국민을 우습게 알고 우롱하는 처사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던지는 색깔론으로 재미 보는 시대는 지났다. 섣부른 색깔론은 오히려 제 발등 찍는 자충수임을 이제 깨달을 때도 됐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기자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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