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개미 울리는 들쭉날쭉 바이오 기업 주가…회계장부 속 연구개발비의 두얼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주요 제약·바이오기업 감사보고서 살펴보니…

"신약 출시되기도 전에…연구개발비 비용처리 않고 자산으로 내세워"

전문가 "자산 처리한 연구개발비, 신약 승인 못받으면 손실 돌변…주의해야"

금융당국 "일종의 바이오업계 분식회계 관행…투자자 피해 우려"

# 제약업체 보타바이오의 주가는 2015년 감사보고서가 발표된 지난해 3월 이후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2015년의 당기순손실이 213억원으로 급증한 게 치명타였다. 손실이 늘어난 원인 중 하나는 그동안 회사가 자산이라 내세웠던 30억원대 연구개발비였다. 연구개발의 결실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자 자산으로 잡아놨던 연구개발비를 손실로 처리한 것이다.

주가 폭락 이후 피해자 모임을 결성한 한 소액주주는 “회사가 장밋빛 전망을 제시해 믿었는데 연구개발에 쓴 돈이 손실로 돌아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지난해 말 ‘늑장공시’ 사태로 홍역을 치른 한미약품. 1년 전만 해도 60만 원대를 웃돌던 이 회사 주가는 27일 30만1500원으로 반 토막이 났다. 실적도 악화했다. 지난 2015년 1300억 원대에 달했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39억원으로 감소했다. 결산 회계감사를 맡은 삼일회계법인이 사업 초기 개발한 일부 항암제가 제약 시장에서 잘 팔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개발 중이던 약의 상품성이 떨어진 것이 왜 대규모 순손실로 이어진 것일까. 비밀은 '연구개발(R&D)비'에 있다. 455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자산으로 잡아놨다가 이를 손실 처리하면서 순익도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에 대해 한승우 한미약품 홍보팀장은 "자산 처리한 연구개발비를 수년에 걸쳐 대부분 비용으로 처리하고 현재는 60억원만 남았다"며 "개발이 진행되는 데 따른 추가 손실은 거의 없다"고 해명했다.

제약ㆍ바이오 기업의 주먹구구식 장부 처리가 개미 투자자를 울리고 있다. 한미약품이나 보타바이오처럼 일부 업체들이 연구개발을 투자비용까지 자산으로 회계 처리한 뒤 나중에 이를 비용으로 인식하면서다. 본지가 셀트리온ㆍ제넥신ㆍ인트론바이오·보타바이오·삼성바이오에피스 등 5개 바이오 업체의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들 업체 모두가 연구개발비의 대부분을 자산으로 처리했다. 이 비중이 많게는 90%를 넘어서는 업체도 있었다.

자산은 땅이나 빌딩ㆍ특허권 같이 경제적 가치가 있는 유ㆍ무형의 재산을 가리킨다. 미래에 돈을 벌어다주는 재산만 자산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의 연구개발비는 출시 시점이 임박한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쓰는 비용만 자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막 개발을 시작한 단계이거나 아직 시장에 출시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연구개발비를 자산으로 처리할 수 없다.

종근당ㆍ유한양행ㆍ녹십자 등 전통 제약회사들은 이런 점을 알고 있다. 종근당ㆍ유한양행의 경우 연구개발비를 전액 장부에서 비용으로 잡았다. 녹십자의 경우 연구개발비의 22.6%만 자산으로 분류했다. 이런 기준은 해외 유명 제약회사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다. 미국 길리어드 사이언스나 스위스의 노바티스 등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이후에 발생한 연구개발 비용만 자산으로 처리한다”는 내부 회계 규정이 있다. 노바티스의 2015년 사업보고서를 보면 이 회사가 그 해 사용한 연구개발비 98억1600만 달러(약 11조원) 중 9%만 자산으로 잡혔있다.

그러나 국내 신생 제약사들은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셀트리온은 전체 연구개발비의 92%를, 제넥신과 인트론바이오는 각각 89.3%, 96.9%를 자산으로 처리했다. 특히 셀트리온이 지난해 자산화한 연구개발비는 7568억원에 달했다. 이렇게 돈을 쏟아부은 연구개발 활동이 신약 개발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앞서 소개한 한미약품ㆍ보타바이오처럼 한순간에 자산이 손실로 돌변한다. 장부만 보고 회사가 탄탄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은 개미 투자자들은 갑자기 불어난 손실과 폭락하는 주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다.

이런 무리한 관행이 자리잡은 건 우량 기업으로 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신생 업체의 경우 신약을 내놓기 전엔 버는 돈이 거의 없다. 개발 기간 10~20년 동안은 적자 행진을 피할 수 없다. 회사를 꾸려 나가려면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거나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더 좋은 조건에서 투자를 받자니 자산이라도 쌓아 놓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1만 개 정도의 신약 후보 물질 중 신약으로 승인받는 물질이 1개 정도에 불과하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장밋빛 전망에 근거한 회계 관행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이재홍 KEB하나은행 기업컨설팅센터 회계사는 “개발하던 약이 임상시험에서 실패하거나 식약당국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자산으로 잡혀있던 연구개발비는 회계장부에서 순식간에 손실로 추락(손상차손)한다”며 “개인투자자 입장에선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회계 전문가들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제약ㆍ바이오 기업 투자 전 반드시 재무제표의 연구개발비 항목을 확인하라”고 조언한다. 박동흠 현대회계법인 회계사는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뜬 기업의 재무제표 주석에서 무형자산 항목의 ‘개발비’ 금액과 판매비ㆍ관리비 항목의 ‘경상연구개발비’ 금액이 얼마인지를 확인하면 이 회사가 어떤 식으로 회계 관리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금융감독원도 국내 바이오 업계의 이같은 회계 관행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바이오 회사들이 임상 시험 단계의 연구개발비를 자산으로 계상하는 것은 일종의 분식회계에 해당할 수 있다”며 “투자자 피해가 커진다면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SNS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포스트]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