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03 (월)

“사람만? 유인원도 디지털기기로 놀 줄 안다”

댓글 2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서울동물원 실험서 확인

경향신문

호주 제인구달연구소 연구원 김남은씨(37)가 지난해 8월 서울동물원에서 오랑우탄을 대상으로 디지털기기에 대한 행동 반응을 실험하고 있다. 호주 제인구달연구소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60년 당시 26세의 젊은 여성이던 제인 구달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곰베강 기슭에서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통념을 깨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흰개미집에 넣은 뒤 나뭇가지에 달라붙은 흰개미들을 먹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유인원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는 세기의 발견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디지털 기반의 디지털기기는 어떨까.

답은 ‘디지털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인간만은 아니다’이다. 지난해 서울대공원 서울동물원에서 실시된 호주교포 김남은씨(37·Nicky Kim-McCormack)의 연구는 이 대답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호주국립대에서 박사과정 중인 김남은 호주 제인구달연구소 연구원은 지난해 2월부터 8월 사이 서울동물원에서 오랑우탄과 침팬지가 디지털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반응 이후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133회에 걸쳐 관찰했다. 유인원들과 관람객이 함께 디지털기기로 놀이를 한 뒤 관람객들의 유인원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하는 것도 실험 내용에 포함됐다.

주요 실험 내용은 유리창 안쪽 유인원들과 바깥쪽 관람객들이 동시에 터치할 수 있는 디지털기기 화면에 비눗방울 모양의 동그라미를 띄워놓고 유인원이 혼자, 또는 유인원과 관람객이 동시에 손으로 만져 터뜨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인원과 관람객이 함께 그림을 그리는 실험도 실시됐다. 실험에 이용된 기기는 엡손 등의 업체가 지원한 것으로 프로젝터를 통해 양방향 터치가 가능하고, 스피커 기능도 탑재된 터치글라스였다.

경향신문

침팬지가 디지털 화면을 터치하고 있다. 호주 제인구달연구소 제공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침팬지 ‘관순’이, 오랑우탄 ‘백석’이 등 대상이 된 개체들은 실험 초기부터 터치스크린에 반응을 보이며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관순이는 관람객 어린이와 함께 능숙하게 방울 터뜨리기 놀이를 즐겼고, 같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김 연구원은 “개체마다 처음 반응을 보인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이 첫 주부터 놀이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실험 결과 대체로 어린 유인원보다는 성체 유인원이 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디지털기기에 반응했다. 또 유인원들은 새로운 방식의 ‘놀이’를 경험한 후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확인됐다. 오랑우탄 가운데 신체 장애를 지닌 개체는 디지털기기 놀이를 경험한 후 눈에 띄게 활동이 활발해졌다. 같은 나이의 오랑우탄과 침팬지 중에서는 침팬지 쪽이 더 상호작용에 적극적이었다.

변화는 실험 대상 유인원에게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유인원이 디지털기기를 사용해 인간과 함께 유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관람객들의 유인원에 대한 인식은 한결 달라졌다. 김 연구원은 “실험 후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85%에서 유인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전환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디지털기기를 이용한 유인원 실험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70년대이지만 동물원에 있는 유인원의 복지 증진과 야생 유인원과의 소통 가능성 타진, 관람객들의 태도 변화 등에 대한 실험은 선진국에서도 아직 초보적인 연구만 진행된 상태다. 서울동물원 실험처럼 디지털기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서의 영향을 조사한 연구는 특히 드물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연구가 동물원 유인원들의 복지 증진은 물론, 야생 유인원과의 소통 가능성도 열 수 있다고 분석한다. 유인원처럼 높은 지능을 지닌 고등생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김 연구원이 서울동물원을 선택한 이유는 현재 거주하는 호주와 고국인 한국 양쪽에 연구 결과를 알리고 이를 통한 인식 제고를 원했기 때문이다. 호주국립대에서 강의한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와 이기섭 서울동물원장의 지원도 서울동물원을 택한 이유였다.

국내 최초의 야생 영장류 연구자인 김산하 박사(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는 “디지털기기를 이용한 행동풍부화 실험은 자연과 비교해 매우 열악한 환경인 사육시설 내에서 새로운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동물이 인지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며 “디지털기기는 하나의 인터페이스를 통해 다양한 자극을 제공할 수 있으며 동물인지과학 연구와도 연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의 침팬지, 고릴라,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의 오랑우탄 등 유인원 대부분은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팜유 농장을 짓기 위한 열대우림 파괴는 오랑우탄들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김 연구원이 유인원 연구를 하는 이유 중에는 유인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 이들 동물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 김 연구원은 내년까지 이번 실험 결과를 정리해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예정이다.

<김기범·최민지 기자 holjjak@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