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피의자 박근혜’, 다음에 설 자리는

댓글 5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
파면 11일 만에 마침내 포토라인에… 영장실질심사 받는 첫 전직대통령 될까



‘피의자 박근혜’가 마침내 검찰 포토라인 앞에 섰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지 11일, 국정농단 사건의 공범인 최순실씨(61·구속기소)가 지난해 10월 말 검찰에 소환된 지 141일 만이다.

총 21시간30분. 박 전 대통령이 대면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머문 시간이다. 피의자 신문 시간만 총 14시간, 검찰에 불려간 역대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가장 긴 시간 조사를 받았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7시간 동안 행적이 묘연했던 전직 대통령은 조서를 검토하는 데만 7시간을 쏟았다. 혐의가 많은 만큼 조서 내용도 수백 쪽에 달할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인데,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변호인과 상의하며 일부 표현을 수정하는 등 매우 꼼꼼하게 조서를 살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돼 불소추특권을 상실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3월 21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포토라인 선 박근혜, 계산된 ‘저자세 전략’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3월 21일 오전 검찰청사 앞에 선 박 전 대통령은 29자의 짧은 메시지를 남기고 조사실로 향했다. 단 8초짜리 ‘피의자 단골멘트’였다. 앞서 검찰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거듭된 대면조사 요청에 불응하는 등 ‘버티기’로 일관했던 박 전 대통령은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현직 대통령으로서의 불소추 특권을 잃자 결국 법의 심판대로 불려 나왔다.

당초 박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 앞서 다소 강경하고 구체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이 예상은 빗나갔다. 박 전 대통령은 파면 선고 이틀 만인 지난 3월 12일 청와대에서 나와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며 대변인 격인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을 통해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해온 만큼 탄핵 불복과 함께 향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강한 법적 투쟁에 나서겠다는 말로 해석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짧은 대국민 메시지는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구속수사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 측이 과거 특검을 비난했던 것처럼 검찰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라는 것이다. 특검 수사와 헌재 재판 과정에서 대리인단을 앞세워 강경한 장외 여론전을 펼쳐 왔지만, 파면이 결정되고 불소추 특권이 사라진 이상 강성 지지층을 향한 정치적 메시지보다는 그래도 구속은 너무하다는 식의 동정 여론을 노린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 중 한 명인 손범규 변호사가 검찰 조사가 종료될 즈음 취재진에게 “검찰에 경의를 표한다. 검찰과 특검은 다르다”는 입장을 밝혀온 것도 같은 맥락의 계산된 전략이라는 것이다.

국민께 송구하다며 조사실로 향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14시간에 이르는 검찰 신문 내내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14가지 혐의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성으로부터의 뇌물수수 혐의 역시 전면 부인했다. 삼성에 대한 승마 지원 요청에 대해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였지 특정 개인의 이익 때문이 아니다”라고 진술했고, “대기업의 체육계 지원은 오랜 관행”이라며 뇌물수수 혐의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위법사항이 될 수 있는 부분은 ‘몰랐다’, ‘기억나지 않는다’며 발을 빼는 전략을 구사했다.

뇌물죄 수사 2막 열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의 정점이자 하이라이트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죄 입증이다. 박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여러 혐의 중 처벌 형량이 가장 무거운 만큼 검찰 조사의 성패를 가를 분기점이기도 하다. 특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구속기소)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하는 대가로 박 전 대통령이 최씨와 공모해 미르·K스포츠재단, 비덱스포츠 등을 통해 298억원(약속 금액을 포함하면 433억원)을 수수한 것으로 봤다. 박영수 특별검사는 특검 수사 종료 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순실 사건은 큰 두 고리가 있는데 하나는 (최씨가) 대통령을 팔아 국정농단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경유착”이라며 “삼성이나 기업들의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행위를 축소해서 보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안 봤다”고 말했다.

특검의 바통을 넘겨 받은 2기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긴밀히 들여다 보는 부분도 박 전 대통령의 추가 뇌물수수 혐의다. 특검의 수사기한 연장이 불발되며 시간상의 제약으로 파헤치지 못한 삼성 이외 다른 대기업과 관련한 뇌물수수 여부가 쟁점이다.

앞서 1기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지난해 말 수사 당시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공모해 대기업들로부터 강압적으로 미르·K스포츠재단의 출연금을 받은 것으로 보고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와 강요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특검이 삼성의 재단 출연금 204억원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대가로 판단,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 혐의를 적용하면서 다른 대기업들의 출연금 역시 뇌물죄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검찰이 박 전 대통령 대면조사를 사흘 앞두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전격 소환한 것 역시 이 같은 혐의를 적용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SK는 최 회장이 2015년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 왔다. 김창근 전 SK그룹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2015년 7월 박 전 대통령을 독대했고, 약 20일 후 최 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이 되자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58·구속기소)에게 ‘하늘 같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 역시 수사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검찰이 박 전 대통령 조사를 앞두고 장선욱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사장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한 것도 추가 뇌물죄 수사를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롯데의 경우 관세청의 면세점 신규 설치 발표 두 달 전인 지난해 2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박 전 대통령을 독대했고, 이후 K스포츠재단에 75억원을 추가 지원했다가 검찰 압수수색을 앞두고 돌려받은 정황이 드러난 상태다. 롯데가 지원한 자금에도 면세점 사업권 등 대가성이 있다고 확인될 경우 신 회장에게도 이재용 부회장과 마찬가지로 뇌물공여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

결국 삼성에 이어 대기업 뇌물 수사의 2막이 열린 셈인데, 문제의 자금이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 아니라 최씨 측에 전해졌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경제적 이득을 공유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역시 혐의 입증에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 박 전 대통령 측은 문화융성과 경제발전을 위해 재단 설립을 지원했을 뿐, 재단 출연에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뇌물 혐의에 대해선 “완전히 엮은 것”이라며 전면 부인한 바 있다.

박근혜-최순실 같은 법정에 서나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과 그의 ‘40년 지기’ 최순실씨의 법정 공방은 불가피해 보인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기소가 유력한 상황에서 그가 최씨와 함께 나란히 재판을 받는 상황도 나올 수 있다.

법원은 효율적 심리를 위해 연관된 사건을 병합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삼성으로부터의 뇌물수수 혐의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공범이라는 것이 특검의 공소사실인 만큼 나란히 피고인석에 앉아 재판을 받을 수 있다. 검찰이 기소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죄 대신 직권남용 혐의를 유지한다고 해도 공범이긴 마찬가지여서 같은 법정에 서는 상황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최씨는 지난해 10월 31일 긴급 체포된 이후 검찰 조사와 법원 공판에서 지속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적극 비호해 왔다. 안종범 전 수석과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48·구속기소) 등이 특검 문턱도 넘기 전에 ‘대통령 지시대로 했다’며 줄줄이 무너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박 대통령이 헌재에서 파면 결정을 선고받은 데는 이들의 탄핵심판 변론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반면 최씨는 국정농단을 둘러싼 박 전 대통령과 자신의 연결고리에 대해 “공모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전면 부인했고, 삼성 뇌물죄 수사와 관련해선 특검 조사에 6차례나 불응한 데다 특검이 체포영장을 집행하자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측은 최씨의 재단을 통한 사익 추구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선을 긋고 있어 이런 달라진 이해관계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당장 최씨는 지난 1월 16일 법원에 출석해 재단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이) 여론을 많이 듣고 보라고 했다”고 진술했지만, 이에 대해 박 전 대통령 측 대리인단은 “재단과 관련해 살펴봐 달라고 최씨에게 부탁한 적이 없고 설사 부탁했다 하더라도 최씨가 마음대로 재단을 운영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지 약 5개월 만에 사건의 ‘몸통’ 격인 박 전 대통령 소환조사를 마친 검찰은 조만간 박 전 대통령의 신병 처리를 결정할 방침이다. 김수남 검찰총장은 박 전 대통령 소환 이틀 후인 3월 23일 “오로지 법과 원칙, 수사 진행상황에 따라 판단돼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김 총장이 박 전 대통령의 신병 처리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으로, 법조계에선 정치적 고려 없이 ‘법과 원칙’으로만 판단한다면 구속영장 청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미 박 전 대통령이 수백억 원대의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는 데다 직권남용 등 나머지 혐의와 관련한 공범이 모조리 구속기소된 상태라 박 전 대통령만 구속하지 않는 것은 법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는 5월 9일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선거운동이 개시되는 다음달 중순(4월 17일) 전 기소하기 위해서는 영장 청구에 시일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면 박 전 대통령은 사상 첫 ‘파면 대통령’에 이어 1997년 도입된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를 받게 되는 사상 첫 전직 대통령이라는 오명도 얻게 된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