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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서랍 속에 담긴 빛바랜 추억의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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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출판사가 공들여 만든 책이 회사로 옵니다. 급하게 읽고 소개하는 기자들의 서평만으로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속도와 구성에 구애받지 않고, 더 자세히 읽고 소개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서 모였습니다. 머니투데이 독자 서평단 ‘동네북’(Neighborhood Book). 가정주부부터 시인, 공학박사, 해외 거주 사업가까지. 직업과 거주의 경계를 두지 않고 머니투데이를 아끼는 16명의 독자께 출판사에서 온 책을 나눠 주고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동네북 독자들이 쓰는 자유로운 형식의 서평 또는 독후감으로 또 다른 독자들을 만나려 합니다. 동네북 회원들의 글은 본지 온·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동네북] <35>‘사랑하는 나의 문방구’…어느 철학자가 들려주는 56편의 문방구 애정 고백록]

머니투데이

연필, 지우개, 볼펜, 연필깎이, 원고지, 만년필, 풀, 자, 가위, 클립, 주머니칼….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시절부터 내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문방구들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편집자라는 직업을 택한 덕분에 여전히 내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친숙한 벗들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만큼 열렬한 마니아는 아니지만 내 서랍 속에도 ‘나의 사랑하는 문방구’ 친구들이 얌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평생을 문필가이자 철학자로 살았으며 120권이 넘는 일기를 썼다는 저자는 56개의 문방구에 얽힌 기억과 애정을 생생하게 기록해 나간다.

“전에 책을 낼 때 제법 나이가 든 출판사 사람과 레이아웃을 상의한 적이 있다. 서로 의논하며 레이아웃 용지에 연필로 선을 긋고 잘못 그으면 지우개로 지우는 일이 끝나고 그가 돌아간 뒤 지우개가 굴러다니기에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려고 주웠다. 그랬더니 아이들과 똑같이 연필로 찌른 주사 자국이 있었고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도 적혀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지우개는 잘못 쓴 부분을 지워주는 고마운 물건임에도 장난질과 괴롭힘을 당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구나.”

지우개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 나도 지우개에 샤프로 그림도 그려 넣고, 괜히 쿡쿡 찔러 구멍을 내기도 하고, 지우개밥을 열심히 뭉쳐서 이런 저런 모양을 만들곤 했지.'

어디 지우개뿐이랴. 교실에서 압정을 밟았던 아픈 기억, 책상을 온통 잉크 자국으로 물들였던 잉크병, 처음 선물 받았던 만년필의 추억, 먹물 묻은 붓을 빨지 않고 두었다가 굳어진 붓 때문에 고생하는 서예시간의 추억 등등 문방구에 얽힌 저자의 추억담은 끝없이 이어진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듯한 정겨운 추억담은 서랍 속에 담긴 빛바랜 추억을 현실로 소환하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어린 시절 좋아했던 문방구의 모습들이 점점 또렷하게 떠올랐다. 선물 받아 소중하게 아껴 썼던 마루젠 문구의 오리온 지우개, 날마다 연습장에 대고 구름 모양을 그려대던 구름자, 원모양이 예쁘게 그려지지 않아 괜히 제품 탓을 했던 컴퍼스, 늘 좋아했고 지금도 나만의 서재가 생기면 꼭 갖춰 놓고 싶은 교무실의 대형 지구본…. 추억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물건은 물건을 거쳐 간 사람들의 흔적과 기억이 켜켜이 쌓이는 장소다. 저자는 단순히 물건에 대한 잡학사전 같은 지식이 아니라 그 흔적과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사색의 시선으로 문방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것이 수십 년의 세월과 이국의 저자라는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넘어 우리에게 공감대를 선사하는 이 책의 매력일 것이다.

혹시 별 쓸모도 없는 문방구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게 쓴 이야기를 왜 읽어야 하냐고 의문을 품을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저자의 이 말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문화에는 어떤 저력을 가진 탄탄한 뿌리가 있지만 그 위에 세워진 부분은 의외로 약하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나타나 이 문화는 아무 쓸모없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간단히 무너진다. 저항할 힘조차 없다. 나는 이것이 무서웠다. 전쟁 중에 질이 떨어지고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대용품이 등장하는 와중에 어쨌든 문화를 지키겠다는 저항이 문방구에는 있었다. 나는 그런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무젓가락에 못을 받은 컴퍼스니 판지로 만든 구름자니 앰풀처럼 생긴 병에 든 잉크 따위를 소중히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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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같은 비상상황뿐만 아니라 경제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문방구와 같은 용품은 소모적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그것이 소소한 문방구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경시 풍조는 순식간에 더 넓은 문화 전체로 확대될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쓸모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 문방구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문화를 지키는 힘’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마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정은문고 펴냄. 224쪽/1만 1800원

배소라 동네북서평단 출판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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