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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편집자 레터] 부드러운 女에세이 vs 짐승 같은 男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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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어수웅·Books팀장


요즘 출판계는 일본 여성 작가 에세이가 봇물입니다. 사노 요코, 사카이 준코, 우에노 지즈코 등이 그 이름들이죠. '사는 게 뭐라고'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등 제목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여성의 자유와 삶을 유쾌한 수다로 풀어내지만, 늘 그렇듯, 과하면 귀하지 않은 법. 사적이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보니, 반대쪽 목소리에 허기가 지더군요.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74)의 산문집 '세계폭주'(바다 刊)에 시선이 멈춘 이유입니다. 그다운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탐미적 남성 작가의 상징 같은 이름 아닙니까. 주지하다시피 폭주의 핵심은 '난폭'과 '스피드'.

몇몇 문장을 인용합니다. "포장된 길로는 들끓는 피를 잠재울 수 없다" "멋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지름길이다" "환영이 아닌 진짜 감동을 얻기 위해서라면, 나는 앞으로도 어떤 일에든 손을 댈 것이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인간들에 둘러싸여 똑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다".

시대착오적 수컷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말로만 그랬다면 위선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는 작가입니다. 자신의 몸이 조금 비대해지자 바로 도쿄 생활을 중단했고, 시골로 내려가 암벽 등반과 마라톤으로 지방을 태워 없앴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입견까지 있어요. 글은 곧 사람이라고, 아니 몸이 곧 글이라고 믿는 작가죠. 덩치 큰 소설가들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뚱뚱한 작가들의 문체는 필요 이상 관념적이고 장황하며, 읽다 보면 화가 날 정도로 둔하다는 편견까지 있으니까요.

이 산문은 오프로드 바이크와 사륜 구동차로 오스트레일리아 사막을 질주하고 케냐의 사파리 랠리를 취재했던 30대 시절의 기록입니다. 삶은 달콤한 위로보다는 쓰라린 각성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마루야마 겐지는 다시 한 번 보여줍니다. 임기응변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사실 버거운 삶이죠. 대리 만족일지 모르지만, 이 금욕적 문학주의자의 산문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어수웅·Books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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