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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단독]택시기사와 사소한 시비 후 '운전자폭행범'으로 몰린 40대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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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와 시비를 벌였다가 화해한 40대 남성이 석 달이 지난 뒤 별안간 운전자 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기소되기까지 자신의 혐의에 대해 아무런 통보나 조사도 받지 못한 채였다.

지난해 9월 22일 밤 유모(46)씨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술을 마시고 택시를 탔다가 운전기사 김모(74)씨와 시비가 붙었다. 유씨는 택시기사가 손을 밀치는 바람에 조수석의 차량 부속물에 부딪혀 손등에 상처를 입었고, 길가에 서 있던 순찰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도 자신이 뺨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쌍방 폭행으로 입건돼 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 도중 두 사람은 화해했고, 이튿날 새벽 유씨는 경찰관으로부터 “합의가 됐으니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될 것”이란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기사와 시비 3개월 뒤 날아든 '운전자 폭행죄'

사건을 잊고 지내던 유씨는 3개월째 되어가던 그해 12월 자신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운전자 폭행 혐의로 기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전자폭행죄는 일반 폭행과 달리 5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중죄에 해당한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니 택시기사가 두 달이 지난 뒤에 처음 진술을 뒤집고 운전 중 폭행당했다고 탄원서를 제출한 게 발단이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유씨를 운전자 폭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것이다.

그런데 사건 처리 과정에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었다.

당시 사건 기록에 따르면 유씨에게 운전자 폭행 혐의를 적용한 증거는 택시기사 김씨의 진술뿐이었다. 공교롭게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택시의 블랙박스는 고장이 나 기록이 남지 않았다.

김씨는 첫 경찰 조사에서 “뺨을 한 대 맞았다”고 했다가 두 달 뒤 작성한 탄원서에선 “주먹으로오른쪽 뺨을 두 대 맞았고 운전 도중 또 뺨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첫 조사에서 “운전 중 폭행이 아니다”라고 했던 진술도 “운전 도중 맞았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맞은 흔적은 없었다. 상해진단서도 제출하지 않았다.

유씨 측 변호인은 “주먹으로 얼굴을 두 대 맞고도 운전을 계속했다는 김씨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운전 도중 폭행을 당하면 사고 위험 때문에 즉시 정차하는 게 상식적이라는 것이다.

죄명 바뀌었는데 증거는 번복된 피해자 진술뿐

아무런 증거 없이 김씨의 바뀐 진술만으로 죄가 더 무거운 운전자 폭행을 적용하면서 당사자를 재조사하는 등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송상교 공익인권변론센터 소장은 “혐의를 뒤집을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의 번복된 진술만 갖고 더 무거운 혐의를 적용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사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례가 있다.

헌재는 2012년 5월 31일 김모씨가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청구한 헌법소원심판에서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청구인 김씨도 택시 기사와 시비가 붙어 폭행으로 입건됐다. 유력한 증거는 운전기사의 진술이었다. 상해진단서도 제출하지 않았고, 맞은 흔적도 없었다.

헌재는 “경찰 단계에서 청구인과 피해자에 대한 단 1회의 피의자신문 조사만을 근거로 하여 검찰 단계에서 아무런 추가 수사도 하지 않은 채 상해죄를 인정한 것은 중대한 수사미진과 자의적인 검찰권 행사”라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민변·서울대 로스쿨생도 "수사절차 이해 안 가"

유씨는 “내 과거 범죄 전과만 갖고 수사기관이 범죄자로 ‘낙인’ 찍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10여년 전 경찰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한 일을 언론에 제보한 이후 공무집행방해 등 여러 건의 범죄 전과가 있었다.

유씨 사건에 대해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생(로스쿨)도 이해할 수 없다며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서울대 로스쿨 2학년 A씨는 탄원서에서 “최초 진술을 두 달이 넘은 뒤에 번복하고 얼굴에 폭행의 흔적이 남지 않는 등 진술의 진정성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며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진술을 번복해 반의사불벌죄에서 그렇지 않은 범죄로 변경되고, 이후 별도 조사를 받지 못하고 재판에 넘겨진 것은 적정한 수사 절차가 아니며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실질적 불이익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유씨는 이번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신청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유길용 기자 y2k753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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