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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역사의 독배’를 마신 김방경-현실과 역사 앞에서 자신을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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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김방경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의 사령관으로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군을 이끈 주역이다. 물론 그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군주의 명에 의해 움직인 ‘왕의 충신’이었지 ‘백성의 충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김방경은 친몽과 항몽 사이에서 수많은 시간을 번민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고려, 왕실, 백성 그리고 역사적 평가라는 무거운 짐이 두 어깨를 짓눌렀고 김방경은 그것을 쉽게 던져 버리는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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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명길과 같은 운명, 비슷한 평가

병자호란은 여러 의미에서 우리에게 치욕스런 전쟁이었다. 삼국시대 이래 수많은 전란을 겪었지만 적어도 군주가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올린 패전은 없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두고배 三頭叩拜(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군신의 예)를 올렸다. 조선의 관리와 사대부들은 통곡을 했고 그 울분은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에게 쏟아졌다. 척화파 김상헌은 최명길이 쓴 항복 문서를 찢었고 최명길은 이를 다시 붙이며 “항복문서를 찢는 신하도, 이를 다시 붙이는 신하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명길이 사대부로서의 자부심과 조선의 대신이라는 책임감이 없어서 주화론을 주장한 것일까.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비난은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지만 최명길은 적어도 백성들이 이 참혹한 전쟁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했고, 비록 항복은 하지만 종묘와 사직은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할 수 있었다. 누구나 큰 목소리로 명분을 주장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명분 뒤에 숨어있는 실리, 즉 생존과 지속의 끈을 부여잡기는 어렵다. 그에 따르는 변절자, 매국노 등의 비난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는 과정 혹은 결과라는 하나의 단면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잣대와 시각에 따라 애국과 매국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로 갈라서는 경우가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의 독배’를 마셔야 하고, 그러기에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

고려의 문신이자 장군인 김방경의 일생도 조선의 최명길의 선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3세기 고려 원종 때부터 충렬왕까지 활약한 인물이다. 문관으로는 수상의 자리에 올랐고 무관으로는 당시 고려 군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그의 활동 시기는 최 씨 무신정권, 몽골의 침략, 삼별초의 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원나라의 간섭기 등 역사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방경은 역사의 전면에 있었다. 때로는 고려의 충신으로, 또 때로는 원나라의 지시를 받은 고려 왕의 지시에 의해 ‘삼별초’라는 어제의 동지이자 고려 백성에게 칼을 겨누어야 했다.

고려 말기와 조선 사대부들은 삼별초의 항거를 ‘반역’이라 불렀고 후에 현대사에 들어야 삼별초의 난은 ‘대몽항쟁의 찬란한 유산’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의 엇갈림에서 자연히 김방경에 대한 평가도 달리했다. 조선에서 만들고 보존한 고려 왕을 모신 사당에 16명의 고려 시대 신하들이 배향되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건국 공신들인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을 시작으로 성종의 서희, 현종의 강감찬, 예종의 윤관, 인종의 김부식, 고종의 조충과 김취려, 공민왕 때의 안우, 김득배, 이방실, 정몽주 그리고 충렬왕 때의 김방경 등이다. 모두 기라성 같은 대신과 무관 그리고 충신들이다. 이들의 선정 기준은 ‘고려 건국과 왕실 및 백성을 국난에서 구하고 충의를 인정받은 신하들’이다. 하지만 역사는 흐르는 강물 같은 것, 김방경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의 사령관으로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군을 이끈 주역이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오로지 군주의 명에 의해 움직인 ‘왕의 충신’이었지 ‘백성의 충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시각에 대한 깔끔한 정리는 어렵다.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방경에 대한 평가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은 그가 묵묵히 국가 안위와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평생을 봉사했다는 점, 그리고 오직 고려만을 생각하고 비겁하게 불의와 모함에 타협하고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김방경은 친몽과 항몽 사이에서 수많은 시간을 번민했을 것이다. 그가 필부였다면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이 우선이었겠지만 그에게는 고려, 왕실, 백성 그리고 역사적 평가라는 무거운 짐이 두 어깨를 짓눌렀다. 또한 김방경은 그것을 쉽게 벗어던져 버리는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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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곁에서 대몽항전을 지휘하다

김방경은 고려 강종 때인 1212년에 태어났다. 당시 고려는 최 씨 무신정권의 집권기였고 최고 실력자는 최우였다. 김방경의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대대로 안동에서 터를 잡았다. 그의 아버지 김효인은 병부상서, 한림학사를 역임하며 그때부터 고려 문벌의 대가로서 자리 잡았다. 김방경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강직해 한 번 뜻을 품으면 잘 굽히지 않았다. 그는 땅을 뒹굴면서 고집을 피며 운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소나 말이 어린 김방경을 피해 지나갔다고 한다. 아마도 미물도 알아보는 위인이었다는 일화일 것이다. 1229년, 당시 18세였던 김방경은 여타 고려 문벌의 관례처럼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식목녹사(정8품)라는 말직에서 시작했지만 그의 재주와 성실성은 금방 눈에 띄었다. 당시 시중인 최종준은 하급관리인 김방경을 특히 아껴 많은 일을 시키고 가르치면서 장차 중책을 맡길 관리로서 키웠다. 관직에 있으면서 김방경은 어릴 때부터의 성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감찰어사로 근무할 때였다. 공물창고 등을 검사할 때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재상의 청탁이 있었다고 한다. 김방경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김 어사, 지금 어사들이 행동이 옛날 어사들의 자세보다 못한 것 같소.”

“저도 옛 어사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으나 저는 오로지 나라의 재정을 비축하고 감사할 뿐 다른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줄 수는 없습니다.”

김방경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중원은 몽골의 기세가 불같이 일어서고 있었다. 초원에서 시작한 칭기스칸의 정복전쟁은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버리고 금나라까지 정복하며 전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고려도 이 불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230년 칭기스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태종은 후방인 고려 정복에 나섰다. 선봉장은 살레타이로 몽골군은 고려에 대한 초토화와 대학살 침공을 시작했다. 고려의 집권자 최우는 대몽전쟁의 선두에 서야 했지만 그에게는 최 씨 무신정권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그는 왕실과 관리 그리고 자신의 친위대 격인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가 은둔 항쟁을 시작했다. 최우는 강화도를 요새로 만들었다. 해안에 방벽을 쌓고 갑곶, 덕진 등의 진을 세우고 1000여 척의 전선과 수만 명의 병사를 집결시켰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간파한 것이다. 몽골군은 눈에 보이는 강화도를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화를 제외한 고려의 전 국토는 몽골 기마대에게 유린당했다.

최우는 육지에 있는 장수들에게 이 같은 명령을 내렸다. “각자 산성과 진을 중심으로 몽골군에게 결사 항전하라.” 그야말로 각자도생하라는 뜻이었다. 당시 고려군의 최정예병력은 삼별초였다. 이들이 없는 육지에서의 전투는 뻔한 결과였다. 몇몇 유격전을 제외하고 대세는 몽골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강화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육지에서 백성들과, 비록 오합지졸이지만 나머지 병사들을 추려 몽골군에 대항했다.

몽고군은 중원 평정이 우선이었다. 공물을 받고 왕족과 관리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또한 감독관인 다루가치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고려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몽골은 무려 30여 년 동안 6차례의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몽골은 금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만주와 화북 일대를 전부 차지했다. 몽골에 완벽하게 항복하지 않은 국가는 당시 남송과 고려뿐이었다. 1235년 몽골군은 다시 고려를 침공했고 전쟁은 무려 4년간 계속되었다.

1248년 김방경은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위도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는 무신이었지만 무신정권에 가담하지 않았다. 즉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다면 그는 강화도로 들어갈 자격도, 조건도 충분했지만 일부러 육지에 남아 백성들과 고초를 같이 겪었다. 몽골군은 집요하게 공격했다. 특히 그들은 가을 추수기에 맞춰 공격해왔고, 곡물을 수탈하고 나머지는 불을 태워 그야말로 고려 백성들을 굶겨 죽였다. 김방경은 몽골의 침입이 시작되자 위도에 방어용 제방을 쌓았다. 그리고 땅을 고르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비축했다. 또한 땅을 파 못을 만들고 빗물을 모아 식수를 해결하는 등 단순히 군사적 행동이 아닌 백성들과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김방경의 이 같은 조치는 고려 조야의 큰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김방경은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죽고 그 시체들이 들판에 가득한 것을 보고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혔다. 몽골에 대한 강한 반감, 무신정권의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반발과 함께 자신은 끝까지 백성들의 곁에서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또한 이를 해결하는 것이 고려의 신하로서 임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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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이자, 외교관으로 고려의 이익을 대변하다

1258년 최 씨 무신정권이 무너졌다. 김준, 임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60년 최 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를 쓰러트렸다. 하지만 1268년 김준은 임연에게 암살당했다. 물론 그들만의 전쟁이었고 강화도에서만 일어난 일이었다. 임연은 권력을 온전히 장악하려 했지만 원종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원종은 개경으로 천도를 주장했지만 임연은 친원파로 돌아선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왕창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당시 원나라 수도 연경에 있던 태자(후에 충렬왕)는 원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임연은 원나라의 거센 반발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공격 협박에 굴복하고 원종을 다시 왕위에 올렸다. 당시 고려는 이장용과 김방경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했다. 김방경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원나라의 관리를 수없이 설득하고 머리를 숙였다.

1263년 원나라의 침공이 뜸해지자 김방경는 상장군으로 진도와 남해안 일대를 침공한 왜구를 격파했다. 하지만 당시 권력자 유천우의 미움을 사 남경유수로 좌천당한다. 그러나 곧 서북면 병마사로 복직했고 형부상서,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김방경의 인생에서 몇 번이나 계속된 모함과 시련의 첫 시작이 남경유수 좌천 건이었다.

1265년, 김방경은 대장군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며 백성을 지키는 장수이면서도 수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고려의 입장을 대신했다. 그러면서도 북계병마사로 있을 때는 원나라에 함락당한 40여 개의 성을 회복하기도 했다. 1269년 원나라 장수 몽가독이 대군을 이끌고 서경에 진주했다. 당시 서경은 심리적으로 고려의 마지노선이었다. 그 이남을 내려오는 것은 침공을 뜻했다. 몽가독은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대동강을 넘으려 했지만 김방경은 강력하게 이를 저지했다. 그러면서 원나라 세조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려 몽가독의 남진을 중지시키는 외교적인 능력도 발휘했다. 1270년 임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권력을 장악했지만 원종과 친원파 귀족들에 의해 제거 당했다. 드디어 1170년 정중부 등에 의해 시작된 100년 간의 고려 무신정권이 몰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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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인 삼별초를 직접 토벌한 고뇌

원종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즉시 개경 천도를 실시하고 친원파적 정치 행태를 보였다. 즉 원나라에 굴종함으로써 왕권은 보호받는 거래를 한 것이다. 물론 무신정권의 항몽투쟁은 무신의 기개,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성의 발로 등의 정신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무신정권의 유지에 초점이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즉 고려의 권력을 걸고 원종과 무신정권이 각기 친몽정책과 항몽정책을 편 것이고 결국은 원종이 권력투쟁에 승리하면서 고려는 친몽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원종은 원나라에게 무신정권의 무력 기반인 삼별초의 명부를 넘겼다. 이는 실질적인 군사권 포기를 의미한다. 삼별초는 즉각 반발했다. 그들은 애초부터 무신정권과 그 궤를 같이 했기에 한순간에 병장기를 버리고 친원파가 되기는 어려웠다. 또한 30여 년간 계속된 몽골의 집요하고 잔인한 침략에 적개심이 극도에 달한 삼별초와 백성들의 원에 대한 반감, 왕권을 위해 원에 항복한 원종에 대한 실망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삼별초의 지휘관인 배중손, 김통정은 끝까지 항몽투쟁을 하기로 선언했다. 그들은 수백 척의 함선에 몸을 싣고 진도로 떠났다. 그 선단에는 삼별초 군대를 주축으로 수많은 고려의 관리, 학자, 백성, 노비 그리고 왕실 일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중손은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한때 그들은 전주, 나주를 함락하고 부산포까지 진출하는 등 남해 일대가 삼별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원종은 원나라와 연합군을 구성해 삼별초 진압군을 출전시켰다. 원나라군 사령관은 아해, 고려군 사령관은 바로 김방경이었다.

김방경은 추도사로서 전주, 나주를 수복하고 진도로 군세를 집중했다. 원나라 원수 아해는 본디 겁쟁이로 그는 후방에서 김방경에게 지시나 내리면서도 김방경의 공을 시기했다. 어느 날 김방경이 개경으로 압송되었다. 아해 등이 ‘김방경이 삼별초와 내통한다’는 모함을 원종에게 한 것이다. 개경에서 문초를 받은 김방경은 혐의를 벗었다. 그리고 다시 고려군을 지휘해 삼별초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1271년 김방경은 교체된 원나라 원수 흔도와의 연합작전으로 진도를 공격해 배중손을 죽이고 삼별초를 진압했다. 물론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김통정을 중심으로 제주도로 이주해 또다시 진지를 구축했다. 이때의 공으로 김방경은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그리고 1273년 행영중군병마원수로 임명되어 원나라 장수 흔도, 홍다구 등과 함께 제주도를 공격했다. 그리고 평정에 성공했다. 무려 4년간 지속된 삼별초의 난이 끝난 것이다.

1271년 몽골은 국호를 원으로 정하고 연경에서 거대한 연회를 열었다. 김방경은 전쟁 중에도 성절사로서 연경에 갔다. 그야말로 삼별초 토벌군 지휘, 사신 파견, 무고로 원나라 다루가치에게 고문까지 당하고 다시 군대를 지휘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일을 당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또 1272년에는 또 다시 무고로 대청도에 유배 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김방경의 능력과 인품을 알고 있는 왕실과 관리들의 청과 몇 번의 사신왕래로 김방경을 높이 평가한 원나라 세조의 호의로 김방경은 방면되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지만 김방경은 한 번의 불만도 내비치지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의 업적 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원나라에게 고초를 당한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 고려 실정을 호소하고 원나라 관리들에게 고려를 상대로 하는 공물과 양곡 방출 감축을 이뤄낸 성과다. 이는 고려의 대신이 아닌 인격체 김방경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자존심과 모욕감이 드는 업무였다. 조선 초기에는 삼별초와 배중손을 ‘반역열전’에 넣고 그들의 항몽투쟁과 자주성을 폄하했지만 이후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 시각으로 변해갔다. 그에 비례해 이를 토벌한 김방경에 대한 평가 역시 단순한 ‘왕의 부역자 장군’으로 비난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방경에게 당시 주어진 선택지는 하루라도 빨리 국난과 내전을 종식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의 삶이 평안해지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김방경의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역시 ‘역사의 독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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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에도 굽히지 않는 충절과 의리

1274년 충렬왕이 즉위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원나라의 전성기 시작이었다. 세조 쿠빌라이는 중원을 거의 평정했다. 당시 쿠빌라이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국가는 남송과 일본이었다. 원나라는 남송과 일본에 대한 동시 공격을 추진했다. 구체적으로 남송과 일본의 해상 교역 루트를 끊어 남송의 고립을 추진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원 세조는 일본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일본은 사신을 죽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원나라는 대규모 일본 원정군을 조직했다. 고려와의 연합군이었다. 지금의 마산인 합포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여몽연합군의 원나라 사령관 홀돈, 그 밑에 홍다구를 임명했다. 고려군은 김방경인 좌부원수 겸 도독사를 맡아 지휘했다. 총병력은 2만5000명, 전선 900척이었고 고려는 육군 8000명, 수군 6700명, 함선과 군량의 대부분을 부담했다. 1274년, 여몽연합군의 선발도가 대마도를 정복하고 북큐슈 일대를 정복하기 위해 하카다에 상륙했다. 그 과정에서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 원나라 군 사령관 쿠둔은 “우리 원나라가 전투를 잘한다고 하지만 고려군의 활약보다 어찌 뛰어나다고 하겠는가”하고 감탄할 정도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운은 일본의 편이었다. 김방경은 상륙 후 진격을 주장했지만 홀돈은 배에 머물면서 지구전을 준비했다. 마침 태풍이 하카다항을 몰아쳤다. 배 안에 머물던 병사들은 그대로 수장당하고 말았다. 여몽연합군은 합포로 철수했는데 당시 전사자가 무려 1만3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 장수 특히 고려인 출신 홍다구와 김방경의 대립은 날카롭게 진행됐다. 홍다구는 김방경의 전공과 전략을 시기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방경을 모함하고 훼방을 놓았다.

고려와 원나라는 대규모 제2차 일본 원정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충렬왕은 제1차 원정보다 적극적으로 가세했다. 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고려에서의 원나라 주도권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측근 세력 중용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남해 일대에 수시로 출몰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왜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김방경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1277년, 원나라 특히 홍다구의 사주를 받은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의 모함으로 김방경은 또다시 투옥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유배당했다. 위득유의 측근이 김방경의 휘하에서 부정을 저질렀고 이를 눈감아 달라는 위득유의 청을 김방경이 거절하고 파면하자 모함을 한 것이다. 김방경의 죄목은 반란이었다. 김방경이 왕과 왕실 그리고 원나라 관리인 다루가치를 죽인 후 강화에서 반란을 꾀했고 그 근거가 자신의 집에 병장기를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홍다구의 잔인한 고문은 계속되었다. 홍다구는 김방경에게 심한 매질은 물론 머리와 목에 철쇄를 두르는 잔인한 고문을 행했다. 이를 보다 못한 충렬왕은 “장군, 원나라의 황제가 현명해 장차 그 억울함이 밝혀질 것인데 어찌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이는가. 차라리 거짓이라도 자백을 하여 그 지독한 고문에서 벗어나라”했지만 김방경은 “전하, 신이 어찌 감히 몸을 아낀다고 거짓자백을 하여 군주에게 누가 되고 사직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겠습니까?”하고 고문을 견뎌냈다. 이 사건은 쿠빌라이의 친국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방경의 역모죄는 무죄를 받았고 병장기를 숨긴 죄는 처벌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김방경으로서는 몇 번에 걸친 모함이 무척 억울했지만 그는 이 또한 고려의 대신과 장수로서 대범하게 받아들였다.

▶역사적 책무와 현실적 의무, 오직 고려

1281년 김방경은 나이 70세가 넘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충렬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제2차 일본 원정의 중책을 맡겼다. 원나라 세조도 직접 김방경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할 정도로 김방경은 충렬왕과 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의 우직한 충정심과 공평무사한 행동을 높이 산 것이다. 한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망시켰다. 그는 영특한 군왕이었다. 그에게 일본 원정은 3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굴복치 않은 일본을 정복함으로써 세계 정복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 둘째는 일본 원정을 통해 고려의 국력과 군사력을 소모시켜 고려의 원나라 저항 의식과 능력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가장 실질적인 목적으로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패망한 남송 군대의 소모전이었다. 세조에게 남송 정복 후 남아 있는 10만 명의 군사력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반란이 두려워 이들을 원정군에 포함시킨 것이다.

여몽연합군은 합포를 출항지로, 안동을 내륙의 군수기지로 삼아 대규모 군대와 물자를 집결했다. 원정군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동로군은 4만 명, 900척의 전선이었다. 이 중 원나라는 3만 명, 고려는 1만 명이 출진했다. 강남군은 총병력 10만 명에 전선 3500척으로 중국에서 출발하는 부대였다. 김방경은 중선대부 관령고려국도원수로 여몽연합군을 총지휘했다. 1차원정과 동일하게 하카다에 상륙한 동로군은 진지를 쌓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고 늦게 도착한 강남군이 정박하자마자 태풍이 불어 여몽연합군은 또 다시 수장되고 만다. 일본은 이 태풍 가미카제를 ‘신풍 神風’으로 대대손손 모셨다. 결국 연합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이 일본 원정으로 쿠빌라이의 목적을 달성했다. 일본은 국력 소비로 결국 가마쿠라 막부가 쇠퇴했고, 남송의 잔여 군대 10만 명은 모조리 수장되어 쿠빌라이를 미소 짓게 했다. 고려 역시 2번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인력과 물자를 소비해 이를 회복하는데 장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김방경은 충령왕에게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 직을 받았다. 즉 내각 수상 겸 군의 최고사령관이 된 것이다. 하지만 곧 김방경은 퇴직했다. 하지만 충렬왕은 사안이 발생하면 김방경에게 자문을 얻었다. 1300년 김방경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수를 누렸지만 그의 일생이 명예와 전공으로 가득 차지만은 않았다. 누구든 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또 삼별초 토벌과 여몽연합군 지휘라는 총대를 메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것을 김방경이 한 것이다.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어제의 전우이고 부하였던 삼별초 토벌은 그에게 ‘삼별초의 군인들과 백성들 중 누구를 먼저 보호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김방경은 여기서 백성을 선택한 것뿐이다.

어쩌면 전쟁은 정치의 도구이다. 그 도구의 지휘관이 가져야할 역사적 책무와 현실의 의무에서 그는 오로지 한 길만 보고 뚜벅뚜벅 걸어간 것이다. 그것은 고려의 안녕이었다.

▷# 처세학 | 유리창은 누가 보지 않을 때 닦는 것이다

<고려사>는 김방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방경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평생 동안 임금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자리에 물러나 한가히 있을 적에도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일과 같이 했고 큰 논의가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자문했다.”

또한 김방경은 군인으로서 확고한 신상필벌과 공평무사의 원칙을 지킨 지휘관이었다. 단 한 번도 권력을 사유화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조직과 나라의 이익보다 먼저 생각지 않은 것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봉직한 고려시대 대학자 이제현의 아버지인 이진은 검교시중에까지 오른 고위직 관리이자 학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는 김방경을 이렇게 평가했다. “천하를 통틀어 언제나 존중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덕이 하나이고 나이가 하나이고 ‘작 爵’이 하나이다. 군자가 세상을 살면서 그중 하나나 둘을 얻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데 하물며 셋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김방경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백성을 구했고 또한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덕이 하나이고, 89세까지 수를 누렸으니 나이가 하나이며, 상국도원수로서 또 공에 봉해졌으니 작이 하나이다. 김방경은 셋을 고루 갖추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보다

-‘피할 수 없다면 표내지 말고 해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월급까지 받는 직장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다수는 관습적으로, 대안이 없어서, 익숙해서 직장생활을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직장인을 괴롭히는 요인은 대인관계, 업무의 과다, 승진과 좌천의 고민 등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직장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특근, 야근, 주말 출근 등까지는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기피하고 하기 싫은 일을 떠맡아 처리하는 것은 그야말로 티 안 나는 설거지나 집안일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어폐가 있는 말이다. 요즘은 ‘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하라’가 정답인 세상이다. 부서에서 부서장이나 경영층이 관심 없고 발전성 없는 업무나, 잘 처리해도 본전이고 잘 못하면 질책과 문책을 받는 업무가 있다. 옛날에는 ‘술상무’라는 직책이 있었다. 그저 관리담당 공무원이나 원청 업체 접대를 도맡아 하는 일로 ‘술 마시고 몸 버리고 공 없는 자리’였다. 발주나 하청 하나 받아오면 당연한 것이고 만약에 실패하면 ‘회사 돈 펑펑 쓰면서 그것 하나 못 한다’는 핀잔 듣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쩌랴. 주어진 직책이라면 이것조차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숙명인 것을.

생각해보자. 해야 할 일이라면 하자. 조증환자처럼 즐겁게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얼굴에 불만을 가득 표현하고 대충 일하는 것은 그야말로 ‘패착’을 두는 것이다. 직장은 꽃길이 아니다. 때로는 험지를, 외롭게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이때가 중요한 것이다. 누구 하나 찾지 않은 구석이라도 그곳을 청소해야 하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 언젠가 ‘누가’ 와서 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임원이 되고 최고 경영자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최일선 영업직, 험로나 새로운 시장 개척 또는 회사의 얼굴을 닦아내는 일을 한 사람들이다. 어차피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것이 직장인의 목표라면 엘리베이터를 타든, 비상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든 방법은 두 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계단으로 한 걸음 올라선 이의 공통점은 그 만큼 내려가는 시간도 느리다는 것이다. 왜? 힘들게 올라 선 것을 알고, 펜트하우스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571호 (17.03.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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