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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기자의 시각] 공무원의 정치 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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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때 일이다. 인사철을 앞두고 기획재정부 핵심 보직에 내부 공무원 A씨가 기용될 예정이었다. 고시 기수든 업무 능력이든 A씨가 순리라는 데 이론이 없어서 인사 발표 이전에 윗선 지시로 미리 가게 될 자리에 앉아 업무를 챙겨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인사가 발표되니 A씨는 해당 보직을 맡지 못하고 기재부 밖으로 발령났다. 기재부 안팎에서는 "청와대에서 A씨의 출신 지역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권 교체기가 도래하니 이 장면이 떠오른다는 공무원들이 제법 있다. 어디 그뿐이랴. 일 처리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던 이가 갑자기 요직을 차지하는 장면도 5년마다 반복된다. 그런 사람들은 고향이니, 학교니 해서 정권 실세와 연결됐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경력 20년 차 경제부처 과장은 "정권 교체기를 네 번 겪는 동안 선배들의 부침을 두 눈으로 보면서 어떻게 해야 출세할 수 있는지 학습효과가 생겼다"고 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중앙부처 관료들의 촉수는 어김없이 여의도를 향한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주변 눈치마저 안 보는 과감한 줄 대기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진보 성향 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이 큰 일방적 대선 판세가 이어지면서 민주당에 올인하는 관료가 제법 된다는 증언이 쏟아진다.

그러는 사이 국정(國政)은 사실상 멈춰 있다. 하지만 관료들만 비난할 일인가. 그동안 집권에 성공한 정치 세력은 인사권을 활용해 관료들을 줄 세우며 권력을 만끽했다. 앞선 정부가 추진한 정책이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5년 주기의 '지우개 국정'이 반복됐다. 이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공무원이 정치권력 앞에 도열하는 폐단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대선 후보들이 '관료의 정치화'를 부추긴다. 문재인·이재명 두 후보가 공무원의 정치 활동을 허용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건 사례가 대표적이다.

공무원들이 드러내놓고 정치 활동을 하면 결과는 뻔하다. 새 권력이 들어설 때마다 지금보다 더욱 노골적인 줄 서기가 벌어지고, 공무원 사회는 이념으로 쪼개져 극심하게 대립할 것이다. 문·이 두 후보는 숫자로 많은 중하위직·지방직 공무원의 마음을 사려고 정치 활동 보장을 내걸었겠지만, 이를 빌미로 국가의 대계(大計)를 짜야 하는 중앙부처 고위직들마저 이런저런 정치 세력에 발을 걸치고 부화뇌동하리라는 건 안 봐도 뻔하다.

이렇게 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관료 사회는 '점령군에 의한 상대편 대학살'로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어느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정권이 끝나갈 무렵 그들도 관료들의 배신으로 뒤통수를 맞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헌법 정신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가 특정 정치 세력의 사복(私僕)이 아니라 국민의 공복(公僕)으로 주어진 책무를 수행할 수 있다.

[손진석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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