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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매거진M] ‘해빙’, 이토록 현실적인 반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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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3월 1일 개봉, 이수연 감독)의 플롯은 복잡하다. 이 영화엔 사실·거짓·망상·환상이 섞여 있고 그 배열도 느닷없다. 승훈(조진웅)이 정육 식당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는 식당의 검은 비닐봉지 안에 사람 머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안에 머리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전철 안이며, 그의 곁엔 두 명의 동남아시아인 노동자가 있다. 꿈이었을까? 그런데 이 장면은 다시 정육 식당 앞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때 성근(김대명)의 아들 경수(이강재)가 나타난다. 그는 성근의 전처가 낳은 필리핀계 혼혈이다. 이런 숏의 흐름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동시에 영화를 퍼즐처럼 만든다.

중앙일보

해빙 / 사진=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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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이라기보다는 ‘진실 게임’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해빙’은 연쇄 살인을 중심으로 한 스릴러임에도 주인공은 경찰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경찰은 상영 시작 후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등장하며, 사건 해결에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승훈에겐 그가 저지르지 않은 일까지 덮어씌운다. ‘해빙’은 사건을 해결하는 범죄영화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여러 관점을 보여 주는 심리 스릴러다. 의심하는 자, 의심받는 자, 목격하는 자, 수사하는 자 등에 의해 ‘진실’은 여러 차례 뒤집힌다.

승훈은 경찰에게 경수가 또래 아이들에게 폭행당하는 걸 목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경수는 승훈이 사채업자(정도원)에게 맞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승훈 앞엔 자꾸 조경환(송영창) 경사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승훈의 대학 선배이자, 아들 영훈(문정현)의 대부이자, 정신과 상담의인 남인수 박사다. 우린 철저히 승훈의 시선에 의해 조경환을 보다가 어느 순간 남인수와 대면한다. 승훈은 병원에서 주로 내시경 검사를 하는데, 집주인 정 노인(신구)이 가수면 상태에서 내뱉은 말(“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에 크게 흔들린다. 그 말에 어떤 진실성이 있는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수연 감독은 ‘해빙’을 왜 이런 방식의 플롯으로 구성했을까?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이야기를 역산해 사건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승훈은 야심 많은 의사였다. 욕망의 실체는 명확하다. ‘돈’이다. 그는 배 여사(정아미)에게 2억원의 사채를 얻어 서울 강남에 그럴듯한 병원을 개업했지만 실패했고,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때 배 여사는 이자를 받는 대신 프로포폴을 맞으러 병원을 찾고, 승훈은 배 여사를 죽인 후 토막 내 한강 이곳저곳에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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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 사진=영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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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승훈은 한참 개발 중인 경기도 신도시에 선배가 개업한 병원의 계약직 의사로 온다.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려는 의도였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것들이 그를 과거로 끌어당긴다. 그 중심엔 죄의식이 있다. 그의 냉장고 냉동실엔 여전히 배 여사의 머리가 있다. 그는 그 머리를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인이나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는 집주인 정씨 부자(父子)야말로, 마음속에 짐승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망상이자 자기방어 기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돈에 대한 욕망을 보여 준다. 그는 이혼 상태에서 2주에 한 번씩 영훈을 만나는데, 이때 열 살짜리 아들 앞에서 주식 이야기를 한다. 살인자가 된 처지에서 주식을 통해 인생 역전을 노리겠다는 생각이다. 곱씹어 보면, 매우 섬뜩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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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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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은 평범한 의사 승훈이 살인마가 되는 이야기다. 이수연 감독은 한 인간이 물욕에 의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꼼꼼히 계산된 퍼즐과 다층적 서사의 방식으로 보여 준다. 승훈의 죄의식은 망상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정씨 부자에게 투사된다. 이 과정에서 시점은 변하고, 진실-거짓의 게임이 발생한다. 만약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는 관객이라면 그 퍼즐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끊임없이 주인공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전개를 버겁게 여기는 관객은 그 퍼즐에서 이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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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의 장르적 완성도에 대한 시비는 있겠지만, 이수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제기하는 테마는 귀 기울일 만하다. 승훈은 정 노인 같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지만, 욕망 때문에 괴물이 되었고, 죄의식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혐의까지 뒤집어쓴다. 어쩌면 이 시대에 ‘보통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스스로 믿는 우리들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현실적인 도덕극이며 반전극이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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