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이라도 매일 혼자 마시면
심각한 지경 이르러서야 알아채
작년 술 의존환자 5명 중 1명 여성
여성은 알코올 분해 효소 덜 분비
간경화·간염 합병 가능성 훨씬 높아
정신질환 동반율도 남성 2배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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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에 사는 최모(25·여)씨는 술 취한 아빠가 엄마에게 손찌검하는 모습을 어린 시절 자주 목격했다. ‘때리는 아빠나 맞고 사는 엄마나 다 보기 싫어’ 가출도 여러 번 했다. 고등학생 때는 소위 ‘일진’이 돼 술과 담배를 했다. 고교 졸업 후엔 고시원에 혼자 살며 술집에서 일했다. 손님들과 일주일에 3~4번씩 술을 마시다 보니 한 번에 소주 3~4병을 마시고 정신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과음하고 손님과 다투는 일도 생겼다. 결국 술집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최씨는 지난해 9월 또 폭음으로 정신을 잃었다. 길거리에서 폭행과 강도를 당하고 쓰러진 채 행인에게 발견됐다.
남성에게나 심각한 것으로 여겨졌던 알코올 의존증이 빠르게 여성들에게 번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알코올 의존 치료를 받은 환자 7만2173명 중 여성은 21.2%였다. 환자 5명 중 1명이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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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점은 여성 환자 숫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환자는 2013년 1만4056명에서 지난해 1만5311명으로 1200여 명 늘었다. 반면 남성은 같은 기간 5만9226명에서 5만6862명으로 2300여 명 줄었다. 일부 연령대는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많다.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2009년 30대 환자에서 여성이 남성을 처음 추월했다. 이후 남성이 더 많은 해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이 더 많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 번에 먹는 술이 많고 음주 횟수도 잦은, 이른바 ‘고위험 음주’도 여성에서 늘고 있다. 고위험 음주란 소주를 기준으로 한 번에 남성은 7잔 이상, 여성은 5잔 이상을 마시는 것을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 반복하는 것을 일컫는다. 남성의 고위험 음주율은 2011년 23.2%에서 2014년 20.7%로 감소했다. 하지만 여성은 같은 기간 4.9%에서 6.6%로 늘었다.
청소년의 음주 행태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여성의 알코올 의존은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질병관리본부와 교육부가 2015년 중1~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위험음주 비율을 조사했다. ‘최근 30일간’ 여학생이 소주 3잔(남학생은 소주 5잔)을 마시면 위험음주에 해당한다. 위험음주율이 남학생 9.6%, 여학생 7%로 성별 간에 차이가 크지 않았다. 15세 이전에 음주를 시작하면 알코올 의존에 빠질 위험이 네 배 높다는 연구가 있다.
알코올 의존증은 남녀 모두에게 위험하다. 하지만 여성에게 더욱 치명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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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알코올 의존이 다른 정신과 질환을 동반하는 비율이 여성에서 더 높다. 2006년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 알코올 의존으로 입원한 환자 270명(남녀 각각 135명) 중 다른 정신과 질환이 동반된 비율을 보자. 여성에선 63%(85명)나 돼 남성(25.1%·34명)의 두 배가 넘었다. 여성에게 흔히 동반되는 질환은 기분장애(51명), 인격장애(24명), 식이장애(16명) 등이었다. 이는 음주 동기와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 마시는 동기를 물었더니(복수 응답) 여성은 부부 문제(46명)가 가장 많았고 이어 가족 내 갈등(42명), 정신과적 문제(36명), 경제적 문제(22명) 등 순서였다. ‘습관적으로 마신다’는 사람은 16명(11.9%)에 불과했다. 반면 남성에게선 ‘습관적으로 마신다’는 사람이 60명(44.4%)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직업적 문제(24명), 정신과적 문제(24명), 부부 문제(18명) 순이었다. 자살을 시도한 경험도 여성(27.4%·37명)이 남성(13.3%)의 두 배나 됐다.
셋째, 최근 유행하는 ‘혼술’(혼자서 술 마시기)이 여성의 알코올 의존 위험을 높이고 있다. 혼술족은 ‘혼자’ ‘적은 양의 술’을 ‘정기적’으로 마시는 경우가 많다. 여성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음주 유형이다. 서울 강남구에 사는 정모(34·여)씨가 이런 사례다. 정씨는 직장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높게 나왔다. 추가 검사를 받아 보니 ‘알코올성 간염’을 앓고 있었다. 정씨는 성인이 된 후 술을 마시기 시작해 퇴근길에 거의 매일 혼자 소주를 반 병에서 한 병쯤 마셨다. 정씨는 ‘알코올 의존 환자’라는 진단에 수긍하지 않았다. “폭음한 적도 없고 주량에 맞춰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는데 내가 왜 알코올 중독이냐”며 의아해했다. 혼자 술을 마시면 본인은 물론 가족도 심각한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알코올 의존을 눈치채기 힘들다. 반면 남성은 불규칙적으로 폭음하기 때문에 알코올 의존이 눈에 잘 띈다.
넷째, 알코올 의존이 신체에 미치는 위해는 여성에게 더욱 크다. 간경화나 알코올성 간염 같은 합병증이 발생할 위험이 여성에서 더 높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게 분비된다. 체중이 덜 나가고 체액은 적은 반면에 지방은 남성보다 더 많다. 술을 적게 마셔도 알코올성 간질환이 생길 위험은 더 높다.
국내에서 알코올 의존은 대체로 남성에게 문제가 됐다. 여성은 알코올 의존 발생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심해선 안 된다. 서구화·선진화가 진전된 사회일수록 여성의 알코올 의존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의 알코올 문제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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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기 교수
연세대 의대 졸업. 연세대 의료원 미래발전추진위원장, 한국중독정신의학회 회장, 과학기술부 세포응용연구사업단 이사,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이사, 학술연구진흥재단 학술연구심사평가위원
」남궁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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