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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안도현의 사람]암수술 이겨낸 봄꽃 같은 제자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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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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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삼월이다. 이렇게 말하면 삼월에는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것만 같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삼월이면 봄꽃보다 신입생들을 먼저 만난다. 중·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나 대학에 있는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신입생들이 목련이고 개나리이고 진달래꽃이다.

이정민을 만난 것도 삼월이었다. 1994년 3월 전북 장수군의 산서고등학교. 오랜 해직교사 생활을 끝내고 찾아간 그곳은 산토끼하고 발맞추기 딱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은 제멋대로 핀 들꽃들처럼 싱싱했다. 정민이의 첫인상은 산서우체국 뒤뜰에 핀 목련 같았다. 친구들보다 키가 컸고 눈이 맑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썩 잘 썼다. 나는 정민이를 데리고 백일장을 다녔고 정민이는 상을 곧잘 탔다. 정민이는 철도보선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썼다.

“아빠는 하루에 삼일을 사시는 분이세요. 새벽에 논일을 하시면서 하루를 사시고, 출근해서는 철도보선원으로 하루를 사시고, 퇴근해서는 또 밤늦게까지 논에서 하루를 사셨죠. 그렇지만 힘든 내색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정민이네 아버지 이준형씨는 열일곱 살에 소년가장이자 가난한 집안의 종손이 되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종가의 제사는 끼니때처럼 돌아왔다. 이준형씨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홉 살과 세 살이었던 두 동생을 키웠다. 군대 제대 후에는 철도청에 입사하여 줄곧 오수역에서 근무했다. 가난한 살림에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오수역까지 이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낮에는 철도보선원으로 일하고, 새벽과 저녁 시간을 이용해 농사를 지으며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았을까. 정민이는 생활력이 강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졸업도 하기 전에 입시학원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다.

정민이는 내가 사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뜸해지지만 정민이는 수시로 안부를 물어온다. 스승의날이면 어김없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언제나 쾌활하고 밝은 표정인 정민이를 보면 흐린 날에도 마음이 맑아졌다.

정민이는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정민이는 시를 쓰는 남자친구 문신을 사귀었다.

“선생님. 제 남자친구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 될 거고요, 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될 거예요.”

정민이는 시 쓰는 남자친구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때 문신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시인을 존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여자친구라니.

문신은 2004년 ‘세계일보’와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당시 허소라 시인과 내가 ‘전북일보’ 심사를 했는데, 그때 나는 정민이의 남자친구로 문신을 인정했던 것 같다. 문신은 자기 능력으로 시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이야기처럼, 정민이가 있었기 때문에 문신이 시인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정민이와 문신은 7년쯤 연애하고 결혼했다. 가난한 시인과 사느라 정민이는 늘 바빴다. 첫째를 임신해서는 만삭의 몸으로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태어난 윤이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그사이의 우여곡절을 나는 들어서 안다. 가난했으므로 젖먹이를 여수 할머니댁에 맡겨야 했고, 학원 화장실에서 퉁퉁 분 젖을 짜야 했다. 그렇게 짠 모유를 냉동시켰다가 주말이면 여수로 달려가 딸에게 모유를 먹였다. 방과후 교사로 있을 때 낳은 세영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막내 주영이는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그사이에 정민이는 독서논술학원을 직접 운영했다.

그런 정민이가 작년 여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하느라 머리카락도 죄 빠졌다고 들었다. 나는 가슴에 칼을 대는 심정을 잘 모른다. 뭉텅뭉텅 빠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심정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정민이가 여성스럽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아파하지 않는 것이 예뻤다. 씩씩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씩씩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올해 마흔 살이 된 정민이는 지금 생애 최초로 휴식을 갖고 있다. 철들면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삶을 돌아보는 중이다. 아버지가 하루를 삼일처럼 살아왔듯 정민이도 그렇게 살아왔다. 삶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할 것이다. 정민이는 작년 가을부터는 오래 잊고 있었던 글쓰기도 새로 시작했다. 일명 모닝 글쓰기. 새벽에 일어나 대학노트에 글을 쓴다. 지난달 목포와 진도를 여행하고 와서는 이렇게 썼다.

“몸이 고장나면서 나는 비로소 멈추는 법을 알았다. 멈추어도 괜찮았다. 곁에는 남편이 있고 또 아이들이 있었다.”

모닝 글쓰기를 두고 남편인 문신 시인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세상을 쓰는 것 같아요.”

경향신문

정민이는 요즘 새벽에 글을 쓰고 아침이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막내는 유치원까지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문득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삶의 속도 때문일 것이다. 정민이는 이제 하루를 하루로 사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그렇게 막내를 유치원에 보내고 오면 오전에는 책을 읽는다. 시도 읽고 소설도 읽는다. 오후가 되면 병원에 간다. 매일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고 3주에 한 번씩 주사를 맞는다. 그래도 몸 안 어딘가에 암세포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호르몬 치료 때문에 갱년기도 일찍 찾아왔다. 그렇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암세포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달에 항암치료가 끝나고 이제 머리카락이 조금씩 자라고 있다. 암덩어리를 떼어낸 가슴은 홀쭉해졌지만 대신 꿈이 커졌다. 느리지만 꾸준히 자라는 머리카락처럼 정민이는 마흔 살에 다시 시작하고 있다.

“선생님.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저는 가슴 없어도 돼요. 세 아이들도 잘 키워야 하고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정민이가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여 년 전, 정민이를 처음 보았던 날처럼 어느덧 삼월이다. 이제 곧 목련도 피고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신입생 이정민은 다시 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민이를 목련이 아닌 다른 봄꽃으로 불러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삼월이 가기 전에, 봄꽃들이 지천으로 피기 전에 정민이네 식구들을 꼭 만나야겠다.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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