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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단독]말레이시아의 북한 유령회사, 건물주에게 월세 물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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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이 있는 쿠알라룸푸르 중심부의 부킷 다만사라 지역에서 자동차로 약 10분간 동쪽으로 달리면 ‘리틀 인디아’라고 불리는 지역의 허름한 베이지색 외관 건물에 당도한다. ‘호텔’ 간판을 단 4층 건물이지만 이곳 2층엔 숙박업과 무관한 사무실이 하나 있다. 북한의 정찰총국이 운영하는 ‘글로콤(Glocom)’이라는 회사다.

정찰총국은 지난 2010년 천안함 폭침의 배후로 지목되는 북한의 핵심 기관이다. 이번 김정남 피살 사건과 관련해서도 거론된 바 있다. 27일 이 곳에 찾아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문패도 없는 상태였다. 장기간 공실이었던 듯, 개봉하지 않은 우편물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건물 1층엔 ‘세를 놓습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내문의 전화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전화를 받은 건물주는 익명을 전제로 “북한 회사가 있었다니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여행업 관련 회사라고 하면서 입주했다. 그래서 세입자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월세를 물어보니 이 건물주는 잠시 머뭇하다 “800달러(약 90만7000원)”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북한 정찰총국의 유령회사 글로콤이 입주했던 건물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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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찰총국의 유령회사 글로콤이 입주했던 건물 1층의 우편함. 왼쪽에서 세번째가 글로콤이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함이다. 오랜 기간 방치된 듯 먼지가 쌓여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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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글로콤이라는 회사는 실재하지 않는다. 대북 제재를 담당하는 유엔 전문가 패널이 지난 24일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콤은 정찰총국이 운영하는 ‘팬 시스템스’라는 회사의 위장업체다. 보고서는 북한 정찰총국이 글로콤을 통해 국제 무기박람회에 참가하거나 고성능 무기를 외국에 판매하며 유통망을 넓히고 외화벌이를 해온 것으로 봤다. 이는 지난 2009년 유엔 안보리가 통과시킨 대북 제재 결의 1874호의 ‘북한의 군사 장비 및 모든 관련 물품의 거래를 금지한다’는 항목 위반이다. 북한이 대북 제재를 피하기 위해 제3국을 경유하는 수법을 개발해왔으며, 그 중 무비자 협정 등을 맺고 있는 말레이시아를 주요 무대로 활용해왔음이 드러난 셈이다.

글로콤은 리틀 인디아 지역을 주소로 한 웹사이트도 지난 2009년 등록해 오픈했다. 말레이시아 현지 기업이 이 웹사이트를 등록한 것으로 기록돼있지만 사실 이 기업의 주주는 북한 국적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고 로이터와 뉴스트레이츠타임스 등 현지 언론이 27일 전했다. 글로콤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스를 줄인 이름이다. 이 웹사이트는 지난해 말 이후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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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찰총국의 유령회사 글로콤이 입주했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건물에 ‘세를 놓는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전수진 기자


북한이 말레이시아를 대북 제재망을 피하는 외화벌이에 이어 김정남 피살의 무대로까지 삼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양측의 44년 우호관계도 금이 가고 있다. 말레이시아 현지 외교가에서도 이런 목소리가 높다. 말레이시아의 탄 스리 시에드 하미드 알바르 외교부 장관은 현지 언론에 “북한이 김정남 피살 경찰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양측의 외교관계는 위험해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갈등의 핵심은 말레이시아 경찰이 김정남 피살 사건 용의자로 지목한 현광성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 조사 문제다. 알바르 전 장관은 현광성이 치외법권 지역인 북한대사관에 은신하고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외교관 신분이라서 면책특권이 있긴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는 (현광성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 즉 외교상 기피인물로 지정해) 추방하는 선택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알바르 전 장관은 1990년대부터 외교부는 물론 내부무ㆍ국토부ㆍ국방부ㆍ법무부 등의 수장을 지낸 말레이시아 정부의 대표인사다. 현재 외교 소식통은 “다름 아닌 알바르 전 장관이 현광성의 추방 가능성을 공개 거론한 것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현광성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체포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북한대사관의 문은 27일 굳게 닫힌 채였다. 강철 북한 대사는 이날 침묵을 지켰다.

쿠알라룸푸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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