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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별별시선]부정맥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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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은 엇박자로 뛴다. 박동이 제멋대로다. 누구나 다 나 같은 줄 알았다. 격렬한 운동을 즐겼고 술도 잘 마셨다. 통증이나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없었기에 한 번도 의식해본 적 없었다. 부정맥인 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일곱 해 전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알게 됐다. 부정맥 중에서도 만성 심방세동이라고 들었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펌프질을 하면, 제때 혈관에 공급되지 못한 피가 뭉쳐 ‘혈전’이 생길 수 있다. 혈전이 뇌혈관을 막으면 뇌경색, 심혈관을 막으면 심근경색을 일으킬 위험이 크다.

경향신문

그때 시인 자의식이 하도 충만했던지라 질병에도 시적 의미를 부여했다. 나는 내 부정맥이 늘 감동하며 살아온 삶의 결과이자 모든 감정을 여과나 완충 없이 받아들여 온 후유증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심장은 마음의 장기라는 은유를 그 근거로 삼았다. 정말로 획일화와 상투성, 규칙적인 것을 싫어하는 내 천성이 부정맥을 키운 원인은 아닐까. 아니면 부정맥 때문에 내 삶도 심장을 닮아 불규칙한 우연과 혼돈, 감정의 기복, 잦은 감동에 본능적으로 기울어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 시술 치료를 받게 되었을 때 괴상한 걱정을 했다. 치료가 되어 심장이 규칙적 리듬을 찾으면 시인의 기질도 사라지는 걸까? 천성 탓에 재발할 수밖에 없는 불치의 병일까? 시술이 끝나고 몇 시간 만에 깨어나 노트에 엉뚱한 메모를 했다.

“일정한 리듬으로 가슴을 쿵쿵 울리는 이 별의 음계가 낯설다. 나만 빼고 모두들 이 음계에 속해 있었다. 엇박자로 뛰던 내 심장은 대체 어느 별의 음악이었을까? 그 음악을 잃은 내 가슴은 지금 몹시 뻐근하고, 거기 오래 머물며 흔들리던 한 사람의 눈빛마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심장박동으로 못 박아 만든 사다리는 삐뚤빼뚤 엉성했으니, 그걸 타고 별을 오르내린 시절과 이제 헤어지고 싶다. 앞으로는 완충과 여과 없이 사랑을 맞닥뜨리지 말아야지. 이 별의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야지. 그러니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제멋대로 떨리는 눈빛아, 머나먼 별에서 온 엇박자 음악아.”

불운하게도 낭만적 망상에 기댄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만성 심방세동은 시술 후에도 재발률이 높아 나는 고주파로 심장의 부정맥 발생 부위를 태워 없애는 ‘전극도자절제술’을 두 차례 더 받았고, 피를 묽게 하는 약을 7년째 먹고 있다. 이 글이 지면에 게재되는 날, 나는 ‘흉강경하부정맥수술’ 후 회복 치료를 받고 있을 것이다. 흉부외과 수술로 부정맥 발생 부위는 물론 혈전을 생성하는 곳을 절제해 완치율도 높고, 무엇보다도 약을 끊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수술 날짜 받는 데만 1년 기다렸다. 드디어 기나긴 부정맥과의 싸움을 끝낼 때가 된 것이다.

불규칙한 박동이 내 몸을 길들여 그게 질병인지도 모르고 사는 동안 나는 뇌경색과 심근경색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비정상이 비정상인 줄 모르고, 아픈데 아픈 줄 모르고,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으니 건강하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 나라와 나는 동병상련이다. 대한민국은 확실히 병들었는데, 내 생각엔 만성 부정맥이다.

비정상이 정상을 대신하는 동안 특별한 증상이나 위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여러 이상신호가 감지됐지만 경제성장이라는 허울로 덮어버렸다. 부정맥 심장이 혈액을 제때 필요한 곳에 공급 못하듯 부정맥 정부는 혈세를 엉뚱한 곳에 낭비했다. 정상적인 규칙 안에서 이뤄졌어야 하는 일들이 비정상적으로 행해져, 마치 응고된 혈전이 혈관을 막듯 곳곳에 적폐가 생겼다. 이 적폐는 결국 국가를 마비시켜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그러하다.

이 만성 질환을 고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지금은 특검과 촛불이 가장 위급한 데부터 손을 대고 있는 중인데, 후속 치료도 정말 중요하다. 부정맥은 재발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병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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