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법칙-16] 재미없는 요소를 담지 않는 게임
앞선 글에서 우리는 '유로트럭'의 재미가 이미 현실에서도 드러난 운전 자체의 재미, 그것도 쉽사리 접하기 힘든 대형 차량을 몰아볼 수 있는 재미만을 뽑아내 게임으로 만들어 냈다는 지점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짚었다. 그리고 이것을 일종의 '로망'이라고 불렀다.
현실이 요즘 말로 '꿀잼'과 '노잼'의 복합체라면, '로망'은 그 중에서 '꿀잼'만을 뽑아낸 이상향에 가까울 것이다. '유로트럭'의 트럭 운전 로망은 대형 트럭 운전의 '꿀잼'이 무엇인지를 디지털 가상세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을 다시 잘 새겨보면, '꿀잼'만을 뽑아낸다는 것은 다르게 말한다면 '노잼' 요소를 제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게임 속에서 현실의 중요한 요소가 생략된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휴식'이다. 오랜 시간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지친 운전자를 표현하기 위해 '유로트럭'은 피로 게이지를 두고, 피로가 쌓이면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다가 나중에는 자동으로 졸음운전이 발생하는 상황을 맞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피로가 쌓인다 싶을 때 주유소 등에서 휴식 버튼을 눌러 쉬어야 한다.
휴식은 버튼을 누르면 순식간에 9시간이 지나가는 것으로 처리된다. 숙소의 질이나 음식물 같은 디테일까지는 굳이 게임 안에 구현되지 않았다. 당연히도 휴식은 트럭 운전 게임에서 별로 재미나는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휴식뿐 아니라 트럭 운전의 로망에 무관한 많은 요소가 게임에서는 간략하게만 묘사되거나 삭제되었다.
"유로트럭2"에서는 피로가 쌓일 경우 화면이 어두워지고 졸음운전 등이 발생한다. 주유소나 톨게이트 등에서 적당히 쉬어야 하는데, 쉬는 과정은 "휴식" 버튼을 클릭하여 9시간을 넘기는 것으로 간략하게 묘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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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다큐멘터리 - 재미없는 게임은 가능한가?
매체로서의 게임은 확실히 기존 매체가 다루지 못하는 많은 것을 체험하게 한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양한 전장 상황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을 다루며 전쟁이 전략적 규모에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게임 논리로 그려내 처음으로 전쟁의 논리를 플레이어에게 체감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롤플레잉 게임들은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서사적 주제를 레벨과 경험치라는 직관적 수치로 객관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성장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게임 플레이 속에서 체험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이 체험을 만들기 위한 생략과 추상의 과정에서 현재의 게임은 한 가지 난관을 맞는다. 바로 재미를 중심으로 한 생략과 추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컴퓨터 기술 정도라면 현실의 트럭 운전 상황에 관계된 더 많은 것을 게임 속에 묘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로트럭2'는 수많은 소재 중 게임에서 재미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요소들을 쳐내면서 게임이 되었고, 인기 게임이 되었다. 오히려 현실을 100% 고스란히 묘사한 무언가가 출시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게임이라 부르기보다는 '시뮬레이터'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게임이라고 부르는 콘텐츠에는 근본적으로 재미라는 유희적 요소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 공군이 조종사 훈련용으로 사용하는 F-35 시뮬레이터. 재미를 위한 생략 없이 가급적 현실과 가깝게 만들지만 방법론적 측면에서 게임과 시뮬레이터는 동일한 맥락을 따른다. /사진=미 공군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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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유희로서 시작되었으니 만큼 게임에서 재미를 분리한다는 것은 무모한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을 통해 게임은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만큼 발전했다. '유로트럭2'를 예로 들자면, 재미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면 이러한 게임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루하루 밀려오는 대출금 이자 상환에 짓눌리며 과로와 과적을 무릅쓰고 밤길을 운전하지만 여전히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결국은 차량을 차압당해 길거리에 나앉는, 우울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은 게임이 출시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면 답은 간단하다. 안 팔릴 것이다.
하지만 안 팔릴 것이 뻔한 이 게임이 만약 실제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화물 운송의 유통구조와 그 안에서 노동자도 사업주도 아닌 애매한 자영업자로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기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나 문학에서도 반드시 대중적 재미만을 노린 콘텐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고발하고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장르와 깊은 취재로 감춰진 배경의 논리를 드러내는 르포문학 등이 재미의 테두리 밖에서도 각각의 매체가 보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게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재미라는 배경을 전제로 쓰곤 한다. 그러나 만약 게임을 뉴미디어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굳이 게임을 재미의 테두리 안에서만 한정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존재하는 세계의 양태를 내면의 논리부터 구축해 드러내는 게임의 매체적 특성을 통해 세계의 이면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재미 이상의 가치가 될 것이고, 게임이 다음 세대로의 도약을 생각한다면 이는 반드시 고민해야 할 방향성일 것이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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