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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4 (화)

[朝鮮칼럼 The Column] 狂氣의 시대, 한국 문명의 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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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성공에 만족하고 도전에 안이하게 대처할 때 문명은 쇠퇴" 토인비가 경고

힘들게 성취한 한국 문명, 광기와 선동에 휘둘리며 다시 가라앉고 있지 않은가

조선일보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아널드 토인비는 문명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발생·성장·쇠퇴·소멸의 과정을 밟으며, 인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생성과 소멸 과정이라 보았다. 그러나 각 문명의 생명주기는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을 띤다고도 했다. 한 문명의 운명은 창조적 소수에 달려 있으니 그들은 도전에 적절히 응전해야 하며, 그들의 모범을 대중이 따르는 것을 '미메시스(모방)'라 규정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문명은 쇠퇴한다. 현재의 성공에 도취해 새로운 도전에 안이하게 대처할 때 문명은 쇠퇴의 과정을 겪으니 토인비는 이것을 오만·자아도취라는 뜻의 단어 '휴브리스(Hubris)'로 설명했다. 토인비의 계시적인 교훈은 문명뿐 아니라 국가·사회·집단·개인에 이르기까지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토인비의 주제는 여러 형태로 변주됐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것을 제국(帝國)에 대입했다. 그 어떤 제국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케네디는 옳았다. 미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1980년대 욱일승천하는 일본과 서독의 기세에 놀란 그는 미국의 시대가 빨리 저물 것이라 속단했다. 여기에 대한 여러 반론이 제기됐다. 그중 대표적인 예는 '21세기 미국 파워'(원제 Bound to Lead)란 책에서 "미국의 전성기는 아직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한 조지프 나이(Nye) 하버드대 교수였다. 1980~90년대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케네디의 의견을 더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최종 결과는 나이의 압승이었다. 현재도 이 논쟁은 시간대와 차원을 달리해 진행되고 있다. '미국 쇠퇴와 중국 대세론'은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미국의 전성기가 더 갈 것이라는 예상은 조지 프리드먼 박사가 각각 이끌고 있다.

한반도를 문명이란 키워드로 분석해본다면 엄청나게 긴 기간 중국이라는 압도적인 거대 문명권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쇠퇴와 한반도의 1945년 해방 이후 남쪽은 의도했건 안 했건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해양문명권의 영향을 받은 특수한 시기였고, 서구 문명과 전통 문명이 융합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유사 이래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부는 중국에 큰소리치는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20여년을 구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성기가 끝나간다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토인비에 대해 강의하면 학생들이 "한국이 바로 휴브리스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라고 예리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1세기가 넘는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 다시 강력해진 중국에 굴종하는 사실상 신(新)조공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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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안팎으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불행히도 여기에 응전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힘들여 키워온 한국 문명은 필연적으로 쇠퇴와 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토인비가 얘기한 문명사의 철칙이었다. 몇 년 전에 김인규 한림대 교수의 글에 인용된 아일랜드 문호 예이츠의 시 '재림(再臨)'에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부분을 읽다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최고의 인물들은 신념을 잃어가고/ 최악의 인간들은 광기(狂氣)로 가득하네.' 훗날 역사가들은 지금 이 시대를 '혼란의 시기'로 표현할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작금의 대다수 역사가를 광기로 가득한 자들로 묘사할 것이다. 사회를 이끌 현자(賢者)들은 매도되고 신념을 잃어가며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대신 좌건 우건, 최순실 집안이건 '최악의 인간'들이 광기를 내뿜고 판친다. 대중은 현자를 '모방'하지 않고 무책임한 선동가들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예이츠의 묵시록적인 시의 광경과 참으로 비슷하지 아니한가.

눈을 돌려 한반도의 북쪽을 바라보면 훨씬 더 암울한 풍경이 펼쳐진다. 북한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체제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 조선왕조 체제, 일본 천황제, 그리고 공산전체주의 체제의 기묘한 혼합물에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울트라 민족주의가 가미된 세계 문명사의 미아(迷兒)로 평가될 것이다. 그곳에는 광기가 일상사가 된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체제를 동경하고 옹호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한국의 여러 집단의 광기가 결합한 이중의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도전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다. 이 혼돈의 끝은 어디일까? 문명사의 많은 경우처럼 외생적 충격으로 돌파구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섞인 기대일 뿐이다. 우리는 잠시 반짝였던 한국 문명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는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문명의 성장을 가져온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집단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니….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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