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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슈 클릭] 청주 한 캔 마시고 환상 보딩?···음주운전 못잖게 위험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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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주스키, 낭만 아닌 민폐

설원 배경 안주+술 인증샷 유행

‘흥 ’주체 못해 무리하다 충돌·부상

“균 형감각 상실, 저체온증 위험도”


중앙일보

보광 휘닉스파크 리프 트 탑승장 입구 왼쪽에 ‘음주 스킹·보딩 금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휘닉스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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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 타기 전에 정종 하나 마시면 끝내줘요.” “술냄새 팡팡 풍기며 눈 위를 휩쓸었지요.” “야간 스키엔 정종이 딱!” 올겨울 스키장을 다녀온 이들이 인터넷에 올린 후기다. 설원과 청주. 낭만적인 조합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발 밑이 보이지 않을만큼 가파른 슬로프를 떠올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 그래도 안전사고 위험이 큰 스포츠인데 음주 상태로 스키나 보드를 타다 큰 부상을 입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본인 뿐 아니라 충돌 등으로 남에게도 피해를 입힐 수 있기에 전문가들은 “음주운전과 다를 바 없다”고 위험성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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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나상욱(34)씨는 지난달 26일 경기도 광주 곤지암 리조트에서 심야 보딩을 즐기다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었다. 본인 실력을 감안하면 무난하게 내려올 수 있는 중상급 코스였지만 그 날은 점프하는 순간 ‘넘어지겠다’고 직감했다고 한다. 당시 소주를 한 병 이상 마신 음주 상태였다.

나씨는 “서울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갑작스럽게 심야스키가 너무 타고 싶어서 서울 근교 스키장을 찾았다”며 “스키장에 도착해서도 편의점에서 일단 맥주 한 캔을 사서 마셨다”고 했다. 문제는 술이 오른 상태에서 슬로프에 오르니 ‘흥’을 주체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평소보다 과감한 동작을 이어가던 나씨는 부상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몸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날 뛰어오르는 트릭(기술)을 시도했다가 착지에 실패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는 “넘어지고는 너무 아파서 1분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며 “뒤늦게 술 먹고 탄 걸 후회했다”고 했다.

나씨처럼 술 마시고 스키나 보드를 타는 건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스키장 간이매점에서 따끈한 어묵 국물에 청주 한 캔을 곁들이는 게 스키장에서 꼭 시도해봐야할 낭만으로 여겨질 정도다. 실제로 스키장에 가면 캔 맥주나 플라스틱 소주병을 몸에 지닌채 틈틈이 마시면서 타는 사람을 어렵지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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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프 앞 식당에서 맥주나 청주를 마시다 설원을 배경으로 찍는 사진은 스키장 대표 인증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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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블로그,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스키장 후기엔 음주 관련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서 ‘#음주스키’와 ‘#음주보딩’으로 검색하면 수백 개의 포스팅이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 술 마시고 술이 깨지 않은 채 스키나 보드를 탔다는 내용이다. 설원을 배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과 청주를찍은 사진이 가장 일반적인 인증샷이다. 리프트에서 캔 맥주 마시는 사진, 눈 밭에서 캔 맥주에 빨대 꽂아 마시는 사진도 있다.

음주 스키어들은 나씨처럼 전작 후에 스키를 타기도 하지만 스키장에 도착한 후 음주를 하는 사람도 많다. 스키장들이 대부분 술을 판매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이원리조트와 지산포레스트리조트, 한솔오크밸리, 휘닉스파크 등은 심지어 슬로프 정상의 매점에서 맥주·청주 등을 판매한다. 또 강원도 알펜시아리조트와 용평리조트, 엘리시안강촌, 전북 덕유산리조트에서도 장내 매점이나 편의점에서 술을 판다. 강원도 휘닉스파크의 홍정윤 대리는 “슬로프 위의 간이매점은 직영이 아닌 임대 형식이어서 리조트에 관리권한이 없다”며 “찾는 손님이 많다보니 계속 판매하는 걸로 알고있다”고 설명했다.

스키장에서 술을 팔거나 마시는 행위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는 없다. 현행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에는 ‘해당 종목 특성을 고려해 음주 등으로 정상적인 이용이 곤란하다고 판단되면 음주자의 이용을 제한해야 한다’고만 나와 있다. 스키장에 한정된 구체적인 단속 기준이나 처벌 규정은 따로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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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부 스키장은 음주스키의 위험성이 꾸준히 제기되자 자체적으로 단속에 나서고 있다. 하이원리조트 최동헌 과장은 “비록 슬로프 정상에서 술을 팔고는 있지만 산 정상에서의 전망을 감상하려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간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스키 장비를 착용한 고객에게는 술을 판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용평리조트는 리프트권을 판매하는 매표소에서 음주 여부를 확인한다. 리프트 탑승 시 음주가 의심되면 이용을 제한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상 단속에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스키장이 슬로프에 ‘음주스키금지’라는 경고 문구를 걸어두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단속이 쉽지 않다는 점을 호소한다. 하이원리조트는 일찌감치 2014년에 음주측정기 단속까지 도입했지만 고객 반발로 중단하기도 했다. 최 과장은 “고글과 헬멧을 착용하기 때문에 리프트 탑승 시에 음주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非) 음주자들은 스키장 내에서의 술 판매를 비난한다. 하지만 슬로프 내에서의 술 판매 금지만으론 음주스키를 막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스키장 외부에서 술 먹고 와서 타는 사람을 통제할 수 없는 데다 숙박 중인 이용객이 숙소에서 늦도록 술을 마신 뒤 스키장으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스키동호회 회원 김모(24)씨는 “단체로 놀러가면 밤에 자연스럽게 술을 마신다”며 “새벽 5시 30분까지 술 마신 뒤 오전스키를 타러 나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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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키어·보더들이 음주스키 위험성을 자각하고 스스로 정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김형일 교수는 “술을 마시면 균형감각에 문제 생기고 저체온증에 걸릴 위험이 크다”며 “통제구역에서 넘어졌다가 뒤늦게 발견되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코리아 스포츠 메디슨 센터의 은승표 원장은 “스키는 선수가 아니어도 시속 50~80km까지 속도가 날 수 있고 맨 몸으로 뛰어드는 종목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부상 리스크가 크다”며 “음주 스키는 훨씬 큰 리스크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슬로프 동시 이용객이 많은 한국에서는 다른 나라 스키장에 비해 유독 충돌 사고가 많다”며 “2차, 3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음주스키는 음주운전 못지않게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스키장에서 판매하는 청주(백화수복)는 알코올도수 13%·용량 180ml로, 한 캔을 다 마셨을 때 혈중알코올농도 0.05%(음주운전 면허정지 수치)까지 나올 수 있는 양이다. 강원도의 알펜시아 리조트 권승현 대리는 “스키장이 음주스키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제대로 관리하는 게 기본”이라면서도 “이용자 역시 ‘이 정도는 마셔도 괜찮다’며 지나치게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음주가 타인에게 큰 위험을 안겨줄 수 있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백수진 기자 soojinpe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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