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문단 성폭력 고발, 발전없는 문단·문단권력 폐해 보여준 것"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사실관계 파악 후"…성폭력 고발, 사진·미술계 등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산 조짐]

머니투데이

문단 내 성폭력 고발 현상이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이어지고 있다. 위계질서에 의한 성추문이 쉽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문단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터질 게 터졌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는 일부 문인들의 성폭력 사건 고발에 대한 반응이다.

미성년자 등 여성 작가지망생에게 상습적으로 성추행 등을 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박진성 시인은 22일 사죄문을 통해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소설가 박범신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일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다"는 사과문을 게재했다.

자성의 목소리와 더불어 '문단 권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다. 미술계 등 다른 문화예술계의 성폭력 고발로도 이어지는 모습이다.

◇ 노혜경 시인 "1990년대 후반부터 여성차별 문제 제기… 발전없는 문단 보여줘"

1990년대 후반 김정란 시인과 함께 문단 내 여성차별 등에 항의하는 '여성시운동'을 벌여왔던 노혜경 시인은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 "문단이 발전이 전혀 없고 오히려 뒷걸음질했다는 걸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노 시인은 "2001년에도 '페니스 파시즘'이란 용어를 쓰며 문단의 여성혐오 현상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도 이런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건 우리 사회의 엘리트층이라고 할 수 있는 문단이 답보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문화를 이끌어야 할 문단이 이미 (문단 내부에서) 선도적으로 제기됐던 문제를 무시하고 묵시해온 결과 이런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게 됐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시, 소설뿐 아니라 광고나 드라마까지 문학이 바탕이 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그러다보니) 문인들에 대해 우리 시대는 어쩔 수 없이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 존경심이 이따금 시인들의 일탈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문화였다"면서도 "(이제는) 충분히 역량을 쌓은 새로운 여성들이 '여성혐오'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고 나온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전에는 뒷구멍에서 욕을 했다면 이제는 앞마당에서 욕하기 시작한 현상"이라며 "'문단 내 성폭력'이라고만 이름을 붙이기엔 규모가 크고, 그 시작이 문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 "문단 권력·등단제도 다시 생각해봐야"…'문단 권력' 비판으로 이어져

권력과 위계질서가 있는 '문단 권력', 또 그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등단 제도에 대한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페이스북에서 "문단이라는 곳은 등단 과정과 서열, 지명도, 세대, 각종 인맥 등에서 매우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곳이며 그 안에서 문인들 간에 권력 격차가 매우 크다"며 "성추문의 온상이 되기 매우 쉬운 곳"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지금은 여성 일반이 더는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라 문단에서도 드디어 각종 성추문들이 터져 나오게 된 것"이라며 "아마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결과적으로 그간 '좋은 시절'을 살아왔던 수많은 '인기 남성 작가들'이나 자타공인의 문단권력자들, 대중적 인기는 없더라도 각급 문단권력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앉아 역시 호시절을 누려왔던 많은 '관료형 문인들' 역시 이제부터 바늘방석에 앉은 형국"이라며 "이제 그런 '문단'이라는 곳은 더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

시인인 황정산 대전대 교수 역시 등단 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갑이 을에게 하는 것"이라며 "등단 제도가 문단 성폭력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촉발하거나 강화하는 간접 원인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작가 지망생들이 등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인 기존 문인이 영향력을 발휘해야 등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일부 문인들은 또 이런 점을 과시해 '갑'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는 설명이다.

황 교수는 "많은 문인이 이런 '선생'의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지금의 등단제도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권력의 근원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며 "이런 비뚤어진 권력관계에서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역량 있는 문인이 길러진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저 권력을 이용하는 치졸한 인간들과 가련한 피해자만 양산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 한국작가회의 "사실관계 파악 뒤 회원들과 논의할 것"

각종 문인 협회나 단체 등은 아직 뚜렷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원식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문학은) 곧 인간에 대한 예의인데 문학한다는 사람들이 (그랬다)"고 비판하면서도 "박범신 작가의 경우 피해 당사자가 (성희롱 주장을) 부인해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한 뒤 작가회의 회원들과 논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문학의 독자는 옛부터 여성들이었다"며 "지난해 표절 논란으로 한국 문학에 상처가 깊었는데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조금 좋아지는 분위기였다가 다시 이런 사태가 나서 (안타깝다)"고도 했다.

앞서 남성 문인들의 성추행과 여성 비하발언 등에 대한 문제가 본격 제기된 것은 지난달이다.

김현 시인은 문예지 '21세기 문학' 가을호의 '질문있습니다'란 기고글에서 "한 시인은 술에 취하면 여자 시인들 아무한테나 '걸레 같은 ○이니, 남자들한테 몸 팔아서 시 쓰는 ○'이니 말하고 다닌다"며 문단 내 여성혐오 현상을 고발했다.

또 다른 시인은 젊은 여자 후배 시인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점수를 매기고 "술만 취하면 여자가 무슨 시를 쓰느냐"는 등 폭언을 일삼았다고도 폭로했다. 그는 "문단 사람이라면 대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며 "우리는 여전히 '잠재적 방관자'"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어 지난 19일 한 트위터 이용자가 박진성 시인으로부터 당한 성희롱, 성추행 경험을 공개했고 다른 피해자들도 잇따라 비슷한 경험을 폭로하면서 문제가 확산했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현재 '#문단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를 이용해 유사한 경험을 고발하거나 공유하고 있으며 미술계, 사진계,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전반의 성폭력 사건 고발로 이어지고 있다.

박다해 기자 doall@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