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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인간은 어떻게 맥주 맛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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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발효균 酵母 19세기 발견… 덴마크 칼스버그 연구소서 배양

맥주 맛은 16세기 유럽서 비롯… 수도원서 대량 생산하면서 진화

효모 연구는 기초·응용 융합 덕분… 유전자 편집 기술로 발전 가속화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우리의 책은 쓰레기, 위대하게 하는 건 맥주뿐,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맥주에 바친 찬사다. 실제로 맥주는 사람이 행복감을 감지하는 능력을 높여준다. 스위스 바젤대 연구진은 지난 23일 국제 학술지 '심리약리학'에 맥주를 마신 사람은 마시지 않은 사람보다 얼굴 사진에서 여러 가지 감정 중 특히 행복감을 감지하는 데 뛰어났다고 밝혔다. 맥주를 마시면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마음도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연 누가 이 '행복 바이러스'를 만든 것일까. 맥주 원료는 보리와 홉, 물이다. 단지 이들을 섞는다고 맥주가 되지 않는다. 발효 세균인 효모(酵母)가 있어야 보리의 당분인 맥아당이 알코올로 변신한다. 덴마크 맥주 회사 칼스버그는 1875년 세계 최초로 맥주 발효를 연구하는 생물학 연구소를 만들었다.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은 그곳에서 1883년 인류 최초로 효모균을 순수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효모는 사람이 그 존재를 알아주기 오래전부터 맥주를 빚어왔다. 기록에는 7000년 전 중동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인들이 맥주를 즐겼다고 나온다.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은 지난 5월 중국에서 5000년 전 만들어진 맥주를 발견했다. 중국 북부 웨이허(渭河) 유역 부근 유적지에서 발굴한 도기에 맥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수메르인이나 고대 중국인이 마신 맥주와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같은 맛이었을까. 벨기에 루뱅대의 유전학자 케빈 베르스티펜 교수는 이달 초 국제 학술지 '셀'에 오늘날과 같은 맥주의 맛은 16세기 이후 나왔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이철원 기자


루뱅대 연구진은 전 세계에서 와인·사케·맥주 등 주류에서부터 빵, 심지어 바이오 연료 제조에 쓰이는 효모까지 150여 종을 모았다. 이들의 유전자를 일일이 해독한 다음, 돌연변이가 일어난 정도를 비교해 역으로 기원을 찾았다. 같은 생물이라면 DNA의 돌연변이는 시간에 따라 동일한 비율로 일어난다. 분석 결과 오늘날의 산업용 효모는 16세기부터 야생종과 구분돼 진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맥주와 와인, 빵용 효모도 그때부터 서로 다르게 진화했다. 이는 역사와도 맞는다. 이 시기부터 유럽에서 맥주가 가정을 벗어나 술집과 수도원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다.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물과 홉, 보리로만 맥주를 만들라는 '맥주 순수 칙령(Reinheitsgebot)'을 내린 것도 1516년의 일이다.

베르스티펜 교수는 "중세의 양조장 장인들은 효모의 정체를 모르면서도 오늘날 과학자가 하는 유전자 개량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종갓집에 가면 오래전 담근 간장을 씨간장 삼아 그 위에 새 간장을 채운다. 같은 방법으로 중세 양조장에서도 맥주를 새로 빚을 때 직전 맥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추가했다. 중세 장인들은 더 좋은 맛을 찾아 다른 양조장의 찌꺼기도 썼다. 때론 훔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효모균끼리 교배가 일어나 더 좋은 품종이 탄생했다.

루뱅대 연구진은 효모균 교배를 통해 사람들이 싫어하는 향기를 내는 유전자가 점점 사라졌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것이 연기 냄새를 내는 '4-비닐 과이어콜(4-VG)' 유전자이다. 오늘날 이 향기는 헤페바이젠 맥주 발효균에서만 나온다. 반대로 알코올에 대한 내성(耐性)은 더욱 강화됐다. 곰팡이에 강한 유전자는 와인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또 효모균은 사람을 따라 전 세계로 이동했다. 이번 연구에서 독일과 벨기에 맥주의 효모는 한 뿌리에서 나왔고, 미국과 영국 맥주의 효모는 한집안이었다. 영국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면서 맥주 효모도 따라간 것이다.

맥주 효모 연구가 루뱅대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벨기에는 맥주 강국이다. 맥주 종류만 450여 가지나 된다. 호가든·코로나·버드와이저 등으로 세계 맥주 시장의 3분의 1을 장악하고 있는 안호이저부시 인베브도 벨기에 회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연구의 때가 따로 있었다. 베르스티펜 교수가 대학원에 다니던 1990년대 후반 루뱅대에서는 맥주 회사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연구만 하고 있었지, 효모 자체에 대한 기초연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화이트헤드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맥주가 관심 밖이었다. 베르스티펜 교수는 2009년 다시 루뱅대로 복귀하고서야 비로소 두 연구를 하나로 합쳤다. 그는 향후 효모에 최신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해 맥주 맛을 높이는 연구를 할 계획이다. 머지않아 맥주병 라벨에 어떤 유전자가 효모에 추가됐는지 적힐지도 모를 일이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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