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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외계생명체가 역사책에 등장하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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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과학 / ‘빅 히스토리’의 미래

한겨레

우주의 시작인 빅뱅 자체가 빅 히스토리의 출발점이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이 허블망원경과 중력렌즈를 이용해 빅뱅 이후 8억~9억년이 지난 뒤 태어난 원시은하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며 공개한 사진. 120억년 과거에 존재했던 우주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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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란 지금까지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고 기록하고 의미짓는 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90억살의 우주가 없이는 태양이나 지구는 물론 그 위에서 생겨난 박테리아에서 공룡,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스토리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시간 속에서 존재한 모든 것, 일어난 모든 일의 이야기를 역사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바로 빅 히스토리다. 빅 히스토리는 21세기에 걸맞은 학문으로 굳건히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가?

역사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시는가. 헤로도토스, 사마천, 삼국지나 수호지, 로마제국 쇠망사,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 혹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심지어 한단고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단어와 개념들이 어른거린다. 이렇듯 우리들에게 역사는 사람의 스토리, 그중에서도 문명의 이야기다. 1만년 전쯤 농경을 시작해서 청동기, 철기를 거쳐 산업혁명을 지나 디지털 시대에 이른 지금까지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밝히고 기록하고 의미짓는 것이다.

우주라는 시공간 총체가 연구대상
빅뱅부터 문명까지 모든 것 다뤄
역사학·천문학·입자물리학 등
인문계?자연계 모든 학문 아우르는
융합과 통섭의 시각 두드러져

역사학자 크리스천이 단초 제공
빌 게이츠가 적극 후원 나서기도
‘조지형빅히스토리협동조합’ 중심
국내서도 꾸준한 활동 이어가
발전가능성 무한한 미완의 영역


그런데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인간만 있는 게 아니잖은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동식물은 물론 예전에 살았다가 사라진 수많은 생물들이 있다. 이렇게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물과 그 삶의 터전을 ‘자연'이라고 하고, 그래서 그네들의 존재와 사라짐을 밝히고 의미짓는 것을 ‘자연사'라고 한다. 지난 몇년간 무척 인기를 끈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같은 곳이 바로 이 넓은 의미의 역사인 자연사를 다루는 곳이다.

거대담론의 결정판이라 할 만

그럼 여기서 끝일까? 글쎄, 세상에는 지구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그렇다. 까마득한 옛날, 46억년 전 태양과 지구가 생겨나던 시점에 우주는 이미 90억살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 90억살의 우주가 없이는 태양이나 지구는 물론 그 위에서 생겨난 박테리아에서 공룡,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스토리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시간 속에서 존재한 모든 것, 일어난 모든 일의 이야기가 역사다. 크든 작든 역사의 일부로서 의미를 갖고 어느 하나도 생략할 수 없이 우주라는 시공간의 총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것들을 가능한 한 모두 다뤄야 진짜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새로이 등장한 개념이 있다. 이름하여 ‘빅 히스토리'. 앞에서 암시했듯 이 빅 히스토리의 탐구 대상에선 어느 것도 비켜갈 수 없다. 일단 이름처럼 무지막지하게 큰 스케일의 일들을 다룬다. 당연히 우주의 시작인 빅뱅 자체가 빅 히스토리의 출발점이다. 빅뱅 직후 입자들이 만들어진 그 짧은 순간들과 우주의 물질 대부분을 이루는 수소와 헬륨의 탄생, 그리하여 그것들이 수억년에 걸쳐 중력으로 천천히 모여 별을 탄생시키고 또 죽어가고, 그러면서 수천억개의 별을 거느린 수천억개의 은하를 이루고 점점 더 빠르게 팽창해 나가는 과정,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또 일어날 것인지, 이 속의 모든 것이 빅 히스토리의 주제다. 가히 거대담론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의 또다른 매력은 단지 이런 거창한 이야기만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소한 물건들도 모두 우주의 나이와 같은 역사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같이 들고 다니는 500㏄짜리 물병을 생각해보자. 기존의 관점에서 이 물병의 ‘역사'는 페트병 공장에서 시작되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야 플라스틱 공장 정도다.

여기서 끝내서는 빅 히스토리일 수 없을 거다. 플라스틱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석유다. 그럼 석유가 만들어진 수억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석유는 페름기 대멸종 때 동식물의 사체가 퇴적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석유의 주성분은 탄화수소, 즉 탄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다. 모든 화석연료의 성분은 탄화수소이고, 그렇기 때문에 태우면 그 속에 갇혀 있던 탄소가 기체가 되어 대기 속으로 빠져나와 온실효과를 이끌어내는 거다.

자,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제 빅 히스토리는 수소와 탄소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우주에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많은 원소인 수소는 모조리 빅뱅 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태양 등 별을 불태우는 연료가 되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탄생시키고 살게 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한다. 원소번호 6번의 탄소는 태양 같은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데 별이 죽으면서 폭발하면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간다. 탄소는 수많은 원소들과 결합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유기물을 포함한 수천만가지의 화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바로 이 탄소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저변 넓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 주변 무엇이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우리 몸의 디엔에이(DNA)와 뼈를 이루는 주성분인 인은 태양 같은 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큰 별이 죽어가면서 만들어지는 초신성 폭발을 통해 우주에 퍼진다.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의 구본철 교수 팀이 얼마 전 그 증거를 최초로 직접 관측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편 여러분 자녀의 돌반지를 이루는 금은 아주 무거운 원소로, 태양의 죽음이나 초신성 폭발보다 훨씬 일어나기 어려운 현상인, 두 개의 중성자별이 어쩌다 충돌해 폭발해서 블랙홀이 되는 과정에서나 생긴다. 이러니 금이 시중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이고, 한편으로 중세 연금술사들이 수은 같은 걸 끓이는 따위로 금을 만들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우주의 시작부터 우리 인류 문명까지의 모든 것을 역사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빅 히스토리다. 이렇게 대충 들어도 아주 흥미로운 학문인 건 명백한데, 그럼 왜 이 시점에서 갑자기 나타났으며 또 중요하게 대두되는 걸까. 그건 다루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격상 융합과 통섭의 끝판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외 많은 학자들이 그간 융합과 통섭을 이야기해 왔지만 그 성과는 슬로건만큼 대단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누구나 필요성은 느끼지만 이를 묵직하게 끌어갈 만한 비전이 약했다. 예컨대 공학과 심리학이 융합해서 ‘유용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융합적 ‘과제’일망정 비전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빅 히스토리를 정리·종합하려면 말 그대로 인문계와 자연계의 학문이란 학문은 다 달라붙어야만 한다. 역사학은 물론 천문학, 입자물리학, 고고학, 고생물학, 고인류학, 지질학, 지리학, 화학, 의학 등등. 이런 학문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성과도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빅 히스토리인데, 이런 적극적인 융합적 사고와 연구는 우리의 터전인 자연과 인간 스스로에 대해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인류가 당면한 총체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빅 히스토리는 다른 고전적인 학문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나지는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매쿼리대학의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1989년 같은 이름의 강좌를 열면서 처음 그 개념이 만들어졌으니 불과 25년 남짓이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정통 역사학자로서 이런 통합적인 분야를 창시하고 강의하는 일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학계의 주류에 쉬이 올라설 수 있는 분야도 아니다. 그런데 그의 강의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 <시간의 지도>(국내에도 번역, 출간돼 있다)가 책으로 발간되고 강의 오디오와 비디오 등이 퍼지면서 이 새로운 학문의 운명을 좌우할 뜻밖의 전기를 맞게 된다. 다름 아닌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관심을 보인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교수의 관점과 접근법에 크게 공감한 빌 게이츠는 재정적인 도움은 물론 테드(TED) 등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빅 히스토리의 개념을 세상에 알렸고, 나아가 국제빅히스토리협회를 공동 창설하는 데 이른다. 이후 빌 게이츠는 이 협회를 통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 각국의 학교에 빅 히스토리 과정을 창설하도록 돕는 등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여러 대학과 많은 고등학교에서 빅히스토리를 정식 과목으로 채택해서 가르치고 있다.

중고생 대상 개설서 20여권 등 나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젊고 생소한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꽤나 독보적인 입지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빅 히스토리의 창시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 자신이 2009년부터 5년간 이화여대에 재직하며 빅 히스토리를 강의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분야의 의미와 가능성을 일찍 꿰뚫어본 이대 사학과의 조지형 교수와 제자인 김서형 박사가 그와 함께하며 융합적 관점을 특히 강조한 우리나라 나름의 빅 히스토리 개념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봄 조지형 교수가 52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별세하면서 국내 빅 히스토리 연구는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이후 그의 선구적 업적을 기리고 성과를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이 조지형 빅히스토리 협동조합을 발족시켰다. 김서형 박사가 이사장을 맡은 협동조합은 빅 히스토리 연구는 물론 이 새로운 학문의 내용과 개념, 의미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여러 사업을 준비 중이다.

빅 히스토리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야인 만큼 완전히 정립된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방향과 내용 면에서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비록 아직 국내에 빅 히스토리를 가르치는 학교는 몇 되지 않지만,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을 중심 필자로 하여 중고등학생들이 읽기 편하게 엮은 20권이나 되는 관련 도서 시리즈가 이미 발간돼 있다. 그리고 동양적인 세계관을 통해 빅 히스토리를 정리하고 바라보려는 시도도 계속되는 중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인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삼라만상의 역사를 엮어가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 지난 수천년 동안의 문명의 집적과 과학의 발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새로 얻게 되는 모든 지식들이 빅 히스토리의 한구석에 얹힐 것이고 언젠가는 외계생명체를 만나 그들의 역사마저 그 속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머나먼 미래에는 우주 전체 구석구석의 역사까지 집대성하는 것, 이런 것을 꿈꿀 수 있는 분야라면 가히 21세기에 걸맞은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파토 원종우, <태양계 연대기> 저자·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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