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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45년 전 오늘, 이산가족 상봉 '첫걸음' 남북 첫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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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판문점서 남·북 적십자회 이산가족 상봉위한 접촉…29년 뒤 첫 상봉]

머니투데이

지난해 10월 금강산에서 진행된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헤어진 가족이 만나 기뻐하고 있다. / 사진제공 = 뉴스1


45년 전 오늘(1971년 8월20일) 남북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양측 적십자회는 이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첫 접촉을 가졌다.

1970년 8월1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남북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8·15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에는 양측 체제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인도적 문제해결과 통일기반 조성 조치를 취하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971년 광복절을 3일 앞둔 8월 12일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남북 이산가족은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이라며 "1000만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전개하자"는 뜻을 북한에 전했다. 북한은 이틀 뒤 국영방송을 통해 수락의 뜻을 밝히며 "가족뿐 아니라 친척·친우까지 왕래토록 하자"는 역제안을 하며 적극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남북 간 합의가 이뤄지면서 이산가족 찾기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양측 적십자 대표는 그해 8월 20일 본 예비회의를 위한 첫 접촉을 하기로 약속하고,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역사적 만남을 가졌다. 양측은 이날부터 다음 달 16일까지 총 5차례에 접촉했다.

이 만남으로 본회담 전 예비회담 준비를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 예비회담은 1971년 9월부터 1년간 5명의 양측 대표가 25차례 만나면서 직통전화 설치와 구체적 이산가족 상봉 방법·장소·시간 등 본회의를 위한 예비논의를 거쳤다.

본회의는 정치적 문제와 양국의 엇갈린 입장 차이 등이 얽히면서 쉽게 풀리지 못했다. 북한 측은 적십자회 수준을 뛰어넘는 것들을 주장하거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회담을 무기한 연장하는 등 배짱을 부리기도 했다.

결국 논의가 시작된 지 14년이 지난 1985년까지 150명 규모 고향방문과 예술단공연만 단 한 차례 열린 게 전부다. 1992년까지 70여차례(본회의 10회, 예비·실무회담 60회) 열렸으나 이상가족 상봉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첫 상봉은 이후로 8년이 2000년 8월15일에서야 이뤄졌다. 그해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처음으로 두 정상이 만나 1국가 2체제에 대한 통일방안과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논의한 뒤였다.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됐으나 올해는 북핵 등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았다.

이재윤 기자 mto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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