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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25년 전 오늘…김학순 할머니,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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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현재 피해 생존자 단 41명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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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한 예술인이 故 김학순 할머니 조각상을 끌어 안고 슬픔에 잠겨있다/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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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25년 전 오늘(1991년 8월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했다. '일본군은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거짓 발표 앞에서 진실을 숨길 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장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사실을 털어놓았다.

위안부의 만행은 잔학했다. 김 할머니의 증언대로 "그야말로 계집애가 이 꽉 물고 강간을 당하는...참혹한" 사건이었다. 발언의 사회적 충격도 컸다. 수만명의 꽃다운 한국 여성이 전쟁터로 끌려가 성노리개로 전락한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증언 이후 이듬해인 1992년 일본 가토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위안부 관여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김영삼 정부는 진상 규명과 보상을 촉구했다. 이후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고노 담화(1993년)가 나왔다. 일본 교과서에는 위안부가 처음 기술됐다. 이렇게 위안부 문제는 조금씩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1997년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일본 우익 단체들이 위안부 배상을 반대하고 나섰다. '양국 국민 간에 재산 및 권리문제는 해결됐다'는 1965년 한·일 수교 협정의 조항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를 인정하는 담론을 '자학(自虐) 사관'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외 시민단체와 정부의 노력으로 위안부는 국제적인 의제가 됐다. 2007년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는 일본정부에 위안부 관련 공식 책임 인정과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미국 각지에는 위안부 기림비와 소녀상이 세워졌다. 2014년에는 유엔 자유권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다. '유감스럽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한다. 지난해 12.28 위안부 합의가 가까스로 타결됐지만 국민들은 분노했다. 진심어린 사과 없이 보상금으로 문제를 덮으려는 일본 정부의 태도 때문이었다. 지난 8월10일에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1243차 정기 수요집회가 있었다.

김 할머니의 최초 증언 후 사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 할머니들의 한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피해 할머니 238명 중 생존자는 단 41명뿐이다. 미국 연방법원 입구에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justice denied)라는 유명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위안부 문제는 언제까지 지연될 것인가.

이슈팀 조현준 기자 newsjun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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