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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단독] 검찰, 추모 전시 중인 천경자 작품 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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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인도 진위 참고한다며 5점 가져가

제출 실랑이 끝 이례적 ‘전시중 압수’



한겨레

26일 저녁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에서 검찰이 떼어간 천경자의 기증작품들 중 일부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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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천경자 화백(1924~2015)의 ‘미인도’ 진위작 공방을 수사해온 검찰이 서울시립미술관의 1주기 추모전에 내걸린 고인의 기증그림 일부를 26일 저녁 전격 압수했다. 98년 천 화백이 서울시에 기증한 93점 전작이 이번 전시에 모두 나온 참에, 이들 가운데 5점을 수사참고자료로 잠시 가져가 살펴보겠다는 명분이다. 전시 휴관일인 27일 밤까지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국내 공공전시 출품작을 사법당국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떼어간 건 전례가 없다. 더욱이 떼어간 그림들은 천 화백이 98년 서울시에 직접 기증한 뒤 유족 뜻에 따라 한번도 외부에 반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유족, 미술계의 반발이 불보듯 빤해 보인다.

미술관 쪽에 따르면, 검찰의 작품 반출은 이날 전시가 끝난 시점인 오후 7시를 넘겨 모든 관객들이 전시장에서 나간 직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의 양선순 수석검사와 조사관들이 곧바로 전시장에 나타나 영장을 제시하고, 미리 지목한 출품작 5점을 전시벽에서 떼어내 상자 안에 넣고 포장한 뒤 무진동 트럭에 실어 가져갔다. 압수해간 작품들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의 대작 2점과 소품 3점. 검찰 쪽은 ‘미인도’의 진위 판별을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자외선, 적외선 비교 분석 대상으로 쓸 수 있는 참고용 그림을 확보해야하며 신속한 조사를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미술관 쪽 한 관계자는 “26일 오후 갑자기 검찰로부터 미술관 수집연구과 쪽으로 연락이 와서 오늘 저녁 전시공개가 끝나는대로 가져가겠다는 통보를 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미술계에 따르면, 검찰은 이미 지난주 미술관 운영진에 연락해 천 화백 전시에 나온 일부 작품들을 내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술관 쪽은 이에 대해 관객과 약속한 전시 기간중 작품을 반출할 수 없으며, 강제집행할 경우 시와 함께 성명서 발표 등으로 강력히 대응하겠다며 반발했다. 검찰은 집행을 미루고 미술관 간부진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지난주 목요일 미술관 간부와 검찰 관계자가 만나 휴관일인 27일 작품을 조사한 뒤 당일 늦은 밤 돌려주는 방식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관 관계자는 “뚜렷한 범법행위와 연관된 경우도 아닌데, 전시기간 중 무고한 작품 압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시가 끝날 때까지 참고자료 확보를 미룰 수 없다는 검찰쪽 채근을 무작정 거부하기는 곤란했다”고 했다. “관객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휴관일 하루만 반출했다가 돌려받기로 사전조율했다”는 설명이었다.

이달 14일 개막한 천경자 추모전(8월7일까지)은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란 제목이 붙었다. 1998년 천 화백이 시에 기증한 93점 전작과 다른 소장가로부터 빌려온 작품 10여점 등 100여점을 전시중이다. 미술관 쪽은 “이날 압수집행에 대해 고인의 대리인인 맏딸 이혜선씨 등 유족에게 별도 통보하지는 않았다. 공권력 집행이라 사후에 알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미술계에서는 기증작품이 미술관 바깥으로 반출될 경우 반드시 작가 또는 유족에게 통보해야하는 것이 작품 관리의 기본인데, 이런 부분이 철저히 무시됐다는 점에서 미술관의 위상을 깎아내린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미술관의 행정 전문가는 “검찰이 외부 관계자이므로 반출 조사를 끝까지 지켜보고 감시하는 호송관(쿠리에)도 동행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검찰과 미술관의 ‘합의’에는 여러모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로 유족 이혜선 씨는 지난주 검찰이 기증그림 제출을 미술관 쪽에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쪽에 강하게 항의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미인도’에 대한 검찰 수사는 고인의 둘째딸 김정희씨(맏딸 이혜선씨와는 아버지가 다르다)가 4월 ‘미인도’의 소장처인 국립현대미술관의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하면서 비롯됐다. 김씨는 소송당시 미술관쪽이 오랜 소장품인 ‘미인도’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진품설을 퍼뜨려 생전 위작이라고 밝힌 고인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다고 소송사유를 댔다. 이와관련해 검찰은 이달 8일 ‘미인도’를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넘겨받아 분석중이다. 추모전시에 출품된 고인의 기증작품까지 떼어가 단 하루만에 비교분석하겠다는 검찰이 과연 위작 수사에서 어떤 성과를 낼지 눈 부릅뜨고 주시해볼 일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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