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9 (목)

[토요 FOCUS] 리디노미네이션, 누구나 필요한건 알지만 아무도 쉽사리 못나선다

댓글 5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매일경제

강남 부자들 사이에서 최근 화폐 단위 변경을 의미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다시 화두로 등장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란 예를 들어 5만원(50000원)권의 경우 '000'을 없애고 50으로 표기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출신인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화폐 단위가 너무 커 사회적 비용이 크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의 불씨를 댕겼다. 사실상의 화폐개혁을 의미하는 리디노미네이션설까지 급부상하면서 강남 부자들의 재테크 트렌드도 변화할 조짐이다. 화폐개혁이 원화 가치를 뒤흔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스타PB센터 부센터장은 "최근에 연 2.39% 확정 금리를 지급하는 달러 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평균적으로 20만달러씩은 가입한다"고 귀띔했다. 강남 부자들 가운데 만약을 대비해 대여금고에 5000만원 정도는 보관하고 있지만 조금씩 달러 자산으로 바꾸는 일이 잦아졌다. 게다가 최근 강남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거품이라고 판단해 일부 처분했던 슈퍼리치들도 다시 부동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실물 자산이 그래도 최고라는 판단에서다.

◆ 1962년 화폐개혁 후 국내총생산 4260배 성장

매일경제

최근 들어 리디노미네이션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가 쓰는 화폐 단위가 비현실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마지막 화폐개혁을 단행한 1962년 당시 명목 국내총생산은 3650억8100만원. 50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4260배 넘게 성장했다. 경제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물가도 당시보다 엄청 올랐지만 화폐 단위는 반세기 전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는 이미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커피전문점 등에서 '아메리카노 2.5, 카페라테 3'이라고 적힌 메뉴판이나 '배송비 포함 3.5에 팝니다' 등 '천(千)' 단위를 뺀 금액을 적은 문구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일반 커피숍에서는 0을 100대1, 인터넷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는 1000대1로 줄여서 표기하는 것이 흔하다.

일상생활에서 100원 단위 미만 거래가 줄어들다 보니 0을 여러 번 쓰는 게 번거롭기 때문이다. 호주 출신의 원어민 영어 강사인 제이슨 치초폴로스 씨(29)는 "호주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받은 월급이 '밀리언 원(million won·100만원)'이 넘는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내게 엄청난 고연봉이라고 말한다"고 웃었다. 국내에서 원화로 월급을 받고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무용담이다.

화폐 단위가 너무 크다는 지적은 2004년 전후에 처음 나왔다. 참여정부 초기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장했다. 하지만 물가 불안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로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현재 화폐개혁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은 저성장·저물가 흐름 기조가 이어지면서 물가 부담이 없고, 국격에 맞지 않으며, 지하경제를 양성화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 화폐발행에 3600억 넘게 들듯 …'부가가치 5조원 창출' 의견도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는 절차는 정부의 화폐 단위 변경 결정→국회의 한국은행법 및 관련법 개정→화폐 디자인과 권종 결정→한국은행의 화폐 발행→화폐 교환 기간 설정→신구 화폐 병행 사용→교환 종료 순이다. 한 전직 한은 관계자는 "결정부터 교환 종료, 인식 변화 등 모든 것이 마무리되는 데 전체적인 기간이 8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산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 숫자만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원론적으로는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중립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950원짜리 상품이 0.95원이 될 경우 상인들이 1원으로 물건값을 올리는 이른바 '우수리 절상'을 할 가능성이 높다. 또 물가 상승으로 총수요와 생산이 영향을 받는다. 아울러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출 증가와 수입 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견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국민이 새 화폐를 신뢰하지 않아 초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사례도 있다.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경제가 얼마나 안정됐느냐에 달렸다.

물론 리디노미네이션에는 상당한 재원이 투입돼야 한다. 앞서 2004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 당시 정부와 한은은 화폐 제조 비용과 현금자동입출금기, 자동판매기, 각종 소프트웨어 교체 비용 등을 고려해 약 2조6000억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현재 비용은 어림잡아 볼 수 있다. 한은은 지난해 공시를 통해 화폐발행비로 1480억9700만원을 썼다고 밝혔다. 지난해 화폐발행액은 총 35조9282억원. 한은이 1원을 들여 242.7원어치 화폐를 찍어낸 셈이다. 올해 5월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화폐액을 가리키는 화폐발행잔액은 88조8685억원. 만약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서 1000원짜리 지폐를 1원짜리 지폐로, 100원짜리 동전을 100전짜리 동전으로 바꾸는 식으로 지폐와 동전 크기를 고스란히 유지한다고 가정할 때 시중에 있는 화폐를 모두 바꾸는 데는 3661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물론 금융기관도 별도 비용이 들어간다. 2013년 4월 기업은행은 예금과 대출 통장에 대한 기장을 변경하고 교체하는 데 총 27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한 적이 있다.

물론 비용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산업적으로는 제지, 인쇄, 잉크, 컴퓨터, 자동판매기 등 리디노미네이션 관련 업종의 매출이 늘어난다. 앞서 2004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 당시 한은 안팎에서는 5조원 정도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보기도 했다.

◆ 짐바브웨의 실패 vs 프랑스의 성공

매일경제

전 세계 각국이 1960년 이후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횟수는 총 58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목적도 다양했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대외 위상을 높이고자, 십진법 화폐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정치적 통합 차원에서…. 다만 성공과 실패는 극명하다. 통상 경제·사회 수준에 비례한다.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는 짐바브웨가 있다. 무가베 정부는 전체 인구 중 0.6%에 불과한 백인이 농토 30%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2005년 백인 소유 토지를 몰수하는 특별법을 제정했다. 곧 유럽이 원조를 중단했고 홍수와 가뭄까지 겹치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2008년 물가상승률은 2억3100만%였다. 이는 매일 물가가 98.6%씩 상승해야 가능한 수준이었다.

대책은 극단적이었다. 그해 100조짐바브웨달러 지폐를 찍었고 물가동결령을 내렸다. 중앙은행은 지폐에서 '0'을 떼어내기 분주했다. 2008년 8월 100억짐바브웨달러를 1짐바브웨달러로 변경한 데 이어 2009년 2월 또다시 1조대1이라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화폐가 신뢰를 잃자 후폭풍을 맞았다. 2009년 짐바브웨에서 미니버스를 타려면 500억짐바브웨달러 지폐 60장(3조짐바브웨달러어치)을 들고 타야 했다. 이는 미국달러로 불과 50센트였다. 상황이 이렇자 공무원들이 앞장서 "월급을 미국달러로 지급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결국 작년 6월 짐바브웨 정부는 당분간 자국 통화 유통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또 짐바브웨 중앙은행은 17경5000조짐바브웨달러를 들고 오면 미화 5달러로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통화 주권마저 상실한 것이다. 가장 기록적인 리디노미네이션으로는 헝가리가 1946년 40양대1로 단행한 사례가 꼽힌다. 단위가 천→만→억→조→경→해→자→양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는 옛 화폐에서 '0'을 28개나 떼 내는 조치였다.

반면 성공적 리디노미네이션 사례로는 1960년 프랑스가 꼽힌다. 당시 드골 정부는 대내외에 경제적 위상 회복을 과시하고자 100프랑을 1프랑으로 교환했다. 이를 통해 달러당 프랑 값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부는 섬세했다. 교환 기간에 대한 종료일을 못 박지 않아 사회적 불안감을 줄였고 강제 교환, 강제 예입, 예금 봉쇄, 사유재산 동결 등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화폐 단위 변경 조치에 국민이 호응하면서 드골 정부는 1962년 신·구권 교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국은 지금껏 크게 두 차례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1953년 전후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면서 통화 가치가 폭락하자 액면금액을 100대1로 절하하고 화폐 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또 1962년 박정희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재원으로 지하에 있는 현금을 꺼내고자 환을 다시 원으로 바꾸고 10대1로 신·구권을 교환했다.

◆ "대선 후보들이 공약 내걸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 추진해야"

상당수 전문가는 현재가 적기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부가 목표하는 명목성장률은 5%지만, 저성장·저물가에 4%도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화폐개혁을 하면 산업생산이 늘어날 수 있고 지하경제 양성화에도 보탬이 된다"면서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000원처럼 높은 화폐 단위를 사용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 국위 선양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오늘날은 예전과 달리 현금자동입출금기 등을 사전에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극비리에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이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하기도 전에 일부 지하경제 자금이 외국으로 유출될 수 있어 하려면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치적 걸림돌도 적다는 평이다. 거대 야당에서 먼저 지지를 하고 있어서다. 당론은 아니지만 앞서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재명 성남시장이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을 지지하고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화폐개혁에 공감을 하면서도 조심스럽다. 지난해 이주열 한은 총재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만 중앙은행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고 국민적 합의나 공감대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전직 한은 관계자는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한은 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국민과 대통령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역대 정권들은 추진할 뜻을 내비치다가도 망설였다. 실패할 경우 정권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한 관계자는 "이제 추진을 본격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면서 "하지만 시점상 대선 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 <용어 설명>

▷ 화폐개혁(currency reform) : 옛 화폐의 유통 정지, 신화폐로 강제 교환, 고액권 발행, 액면가치 변경 등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모든 조치를 뜻한다.

▷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사전적으로는 액면가를 뜻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명칭 변경을 동반해 유통 화폐의 액면 가치를 법정 비율에 따라 일률적으로 저감하는 것을 가리킨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환→원, 원→환 전환이 대표적이다.

▷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 사전적으로는 다시라는 뜻인 're'가 붙어 디노미네이션을 조정 또는 변경한다는 뜻이다. 통상 디노미네이션과 혼용해 쓴다. 하지만 화폐 단위 변경 없이 비율 조정을 하는 통화 개혁 조치를 리디노미네이션으로 봐 디노미네이션과 구분하기도 한다.

[이상덕 기자 / 정의현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