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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당신의 도어록 비밀번호, 몰카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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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지난달 소름끼치는 경험을 했다. 점심쯤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현관 도어록이 해제될 때 나는 전자음이 들렸다. ㄱ씨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들어오는 낯선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자다 깨서 낯선 사람이 방에 서있는 모습을 보고선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당황스럽고 무서웠다”고 ㄱ씨는 당시를 떠올렸다. 몇 초인지 모를 시간이 흘렀고, 침입자는 다시 문을 열고 도망갔다. ㄱ씨는 겨우 정신을 차려 경찰에 신고했다.

ㄱ씨는 그 사건 이후 며칠 동안 잠들었다가도 새벽에 깨고, 불안감에 집에서 혼자 잠을 자지 못하는 나날을 겪었다. 베란다나 창 밖에서 소리가 나면 다시 문을 잠그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ㄱ씨는 “번호를 알아야만 열 수 있는 도어록을 설치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니 무척 불안했다. 어떻게 문을 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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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붙은, 화재경보기처럼 보이는 물건이 몰래카메라다. 사진 경찰 제공


■몰카가 당신의 비밀번호를 보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혼자 사는 ㄱ씨의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훔쳐본 건 ‘몰카(몰래카메라)’였다. 이는 ㄴ씨(43)가 지난 1월 설치한 것이었다. ㄴ씨는 지난 1월 2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서울 마포·서대문 소재 오피스텔 및 원룸 8곳에 잠입했다. 인터넷에서 구입한 몰카를 도어록 키패드가 잘 보이는 복도 천장에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치밀했다. 현관에 경비원이 상주하지 않는 건물을 노리고, 우편함에 든 우편물에 적힌 이름을 근거로 여성 혼자 사는 집을 골랐다.

ㄴ씨는 설치한 몰카를 2~3일 뒤에 다시 떼어갔다. 피해 여성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영상을 돌려보며 비밀번호와 피해자가 집에 머무르는 시간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알아낸 비밀번호를 들고 피해자들이 자리를 비운 낮 시간대를 틈타 원룸과 오피스텔에 침입했다. 다만 범행 현장에 오래 머무르거나 귀금속을 훔치지는 않았다. ㄴ씨를 조사한 경찰은 “ㄴ는 피해자 집에 들어가 2-4분 정도만 있다가 나왔다. 조사하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대신 ㄴ씨는 피해자의 여권사진이나 학생증 등을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추후 경찰이 조사한 ㄴ씨의 컴퓨터 속 파일에선 ㄴ씨가 촬영한 피해자의 여권사진, 신분증, 전세계약서 등이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책상이나 서랍 속을 뒤져서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는 물건이 나오면 촬영한 다음 물건은 그대로 두고 나왔다”고 전했다. ㄴ씨는 경찰 조사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일 경우엔 피해를 줬단 느낌이 안 왔다.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아야 피해를 줬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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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씨가 사용한 형태의 몰래카메라. 사진 경찰 제공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피해자들

ㄴ씨의 범행은 지난달 피해자 ㄷ씨 집에 침입할 때 마침 방안에 있던 ㄷ씨와 맞닥뜨리면서 덜미가 붙잡혔다. ㄷ씨가 집을 비웠으리라고 짐작한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ㄷ씨와 마주쳤고, 당황한 그는 ㄷ씨의 얼굴, 팔 등을 폭행하고 달아났다. 주변 폐쇄회로(CC)TV를 분석한 경찰이 ㄴ씨 주거지 인근에서 잠복근무를 벌인 끝에 그를 검거할 수 있었다.

피해자 대다수는 ㄴ씨가 자신의 집에 침입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피해자의 생활 패턴을 파악한 ㄴ씨가 피해자들이 집을 비운 시간대에 잠깐 머물렀고, 눈에 띄게 훔쳐간 물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금 약 40만원을 분실한 피해자도 있었지만 ‘내가 잃어버렸겠거니’ 하고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서야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내 집에 들어왔다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경찰은 “ㄴ씨의 컴퓨터에 저장된 방 호수와 비밀번호를 근거로 피해자를 가려냈다”고 밝혔다.

피해 사실을 알게된 피해자들은 “무섭고 끔찍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젊은 여성이 혼자 사는 곳에 남자가 몰래 들어왔다고 하자 피해자들은 일단 ‘집안에도 혹시 몰카가 설치돼 있는지’부터 물어봤다”고 전했다. 현재까지는 집 안에서 몰카가 발견된 바 없다고 경찰 관계자는 덧붙였다.

■“남자는 무서워서” 여성만 노린 피의자

이런 범행을 벌인 까닭은 무엇일까. ㄴ씨는 모바일 게임업체를 운영하다 파산한 전력이 있다. 경찰에 따르면 ㄴ씨는 “세상이 나에게 피해를 줬단 생각에 화가 쌓였다. 적절한 (화풀이) 대상을 찾던 중에, 남자는 동성이기 때문에 무섭고, 여자가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 몰카를 인터넷으로 구입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뒤에서 욕하는 심리였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ㄴ씨가 인터넷으로 구입한 몰카는 겉보기에 화재 탐지기와 똑같이 생겼다. 피해자들이 의심을 할 수 없었던 정황을 뒷받침한다. 경찰 관계자는 “인터넷에서 몰카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몰카가 소형화 돼있기 때문에 이런 범죄가 발생할 개연성이 높다”며 “이상한 물건이 설치 돼 있거나 하면 관심있게 보고, 수상하면 바로 신고해달라”고 당부했다. 또한 경찰은 “긴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를 경우 몰카가 잡아내지 못한다. 아니면 손으로 가리고 누르는 것이 좋다”고 전했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ㄴ씨를 건조물침입·주거침입·상해 혐의로 구속 입건했다고 3일 밝혔다. 동종 전과는 없다. 경찰은 “아직까지는 집 안에 몰카를 설치한 바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혐의만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ㄴ씨는 2일 오전 검찰 송치됐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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