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1 (토)

[진화의 창] 왜 ‘헬조선’이 문제인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헬조선’. 지옥 같은 한국 사회를 가리켜 청년들이 냉소하며 부르는 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일자리를 얻기 어렵다. 간신히 취업해도 노예처럼 착취당한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상류층 자제들이 비행기로 유유히 탈조선에 성공할 동안, 흙수저 물고 태어난 서민층 자식들은 한강으로 탈조선한다. 중산층이 무너져 경제적 불평등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망한민국’의 상황을 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화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행여 오해는 하지 마시라. 진화심리학은 노력해도 안된다며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얘야, 누굴 탓하겠니? 다 네가 불량한 유전자를 타고나서 그렇지”라며 결정타를 날리는 학문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외부의 특정한 환경 조건이 있을 때만 비로소 반응하도록 설계된 수많은 심리적 도구들의 묶음이다.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외부 조건에 대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게끔 진화했을지도 추론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불평등이 심해지면 특정한 방향으로 - 먼 과거의 환경에서 번식에 유리했을 방향으로 - 행동하는 본성을 지닌다.

경향신문

이제 경제적 불평등에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대처하도록 진화했는지 보자.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자식 수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자식을 몇이나 길러내면 성공한 것일까? 셋을 키웠다면 성공한 걸까? 이는 다른 이웃들이 길러낸 자식 수에 달렸다. 남들이 하나씩만 길렀다면 셋은 성공이다. 남들이 다섯씩이나 길렀다면 셋은 실패다. 한마디로, 진화적 성공은 상대적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진화의 역사에서 자식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던 자원이나 기회를 두고 경쟁하게끔 설계되었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 부부는 명저 <살인>에서 집단 내에 상이한 경쟁 전략이 있다고 가정했다. 각 개체는 둘씩 짝을 지어 싸운다. 고위험 전략은 상대에게 이길 가능성이 크지만, 지면 크게 다쳐 죽을 수도 있다. 저위험 전략은 이길 가능성이 작지만, 지더라도 죽지는 않는다. 어느 전략이 득세할지는 승자 혹은 패자에게 주어지는 상금(자식 수)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에 달렸다. 경쟁의 성패에 따라 얻는 상금이 엇비슷하다면, 안전한 저위험 전략이 득세한다. 반대로 상금의 격차가 엄청나다면, 고위험 전략이 득세한다. 만약 패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전략인데도 말이다. 어쨌든 거액의 판돈이 걸렸다면 “못 먹어도 고!”를 일단 외치고 봐야 하는 셈이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경쟁의 성패에 따른 자식 수의 격차가 클수록 위험한 경쟁 전략이 선택된다는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 번식에 완전히 실패할 확률이 높은 흙수저들이 어떻게든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위험한 행동에 뛰어들고, 때로는 죽음조차 무릅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사회 내의 경제적 불평등은 살인 등의 폭력 범죄, 도난 등의 비폭력 범죄, 약물 남용, 성적 문란, 신체 및 정신 건강, 비만, 생존율과 밀접하게 연관됨이 여러 연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데일리와 윌슨은 캐나다의 10개 주와 미국의 50개 주를 대상으로 각 지역 내의 소득 불균형 정도와 살인 사건 발생률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한 주일수록 살인 사건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 나라의 살인율이 왜 이토록 차이가 나는지 조사한 다른 연구들도 국민 총생산이나 실업률, 근대화의 정도 등등 다른 변수들보다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변수가 살인율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결론 내렸다. 요컨대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국민들 사이에 부가 얼마나 잘 분배되어 있는가가 그 나라의 범죄 발생률, 기대수명, 신체 및 정신 건강, 행복 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헬조선에서 불황과 취업난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 마련, 희망 등등 진화적 과거에 번식으로 연결되었을 자원과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 질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짧은 생애를 마감할 일만 남는다. 자연선택은 이렇게 앞날이 암울한 젊은이들이 범죄, 사고, 도박, 약물 남용 등 사회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위험한 행동을 감수하게끔 설계했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 혹시나 성공하면 인생 역전을 꿈꿀 수 있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 복지를 확충하는 국가 정책은, 보수주의자들이 종종 생각하는 바와 달리, 게으른 사람들에게 혈세를 낭비하는 헛짓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 행복의 새 시대를 여는 주춧돌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면, 진화심리학은 보수 또는 진보 어느 한쪽을 편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진화심리학은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다. 범죄가 만연하고 질병과 스트레스가 넘치는 현실을 계속 유지할지 아니면 바꿀지는 결국엔 정치적인 결정이다. 만일 범죄를 줄이고 기대수명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자고 모두가 합의했다면, 진화심리학은 우선 무엇보다도 계층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노력을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전중환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진화심리학>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