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불국사·천마총·황룡사터·미륵사터…고대 유적 ‘발굴의 제왕’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겨레] 원로 고고학자 김정기 박사 별세

그는 발굴의 제왕이었다. 1960년대 이래 20여년간 온나라 곳곳의 땅 속에서 그가 파내고 거두어 알린 다기한 고대의 유적 유물들은 국민들에게 친숙한 역사가 되었고, 언론과 학계에는 숱한 전설과 야화의 산실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정작 자기 스스로는 유물 캐는 것을 그리 좋아한 게 아니었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다.

경주의 천마총, 황남대총, 황룡사터와 익산 미륵사터 등 60~80년대 국가 주도의 대형 발굴사업을 진두지휘하며 한국 고고학과 고건축사의 초석을 닦은 원로학자 창산 김정기(사진) 박사가 26일 저녁 서울 은평구 신사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삶을 접었다. 향년 85.

고인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중학교를 마친 뒤 일본 메이지대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건축을 전공한 그는 59년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설득으로 귀국해 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경주 감은사터 조사작업을 맡으면서 국내 유적 조사에 뛰어들었다. 나라 지키는 호국룡이 되어 절터를 드나들다고 싶다고 했던 신라 문무왕의 유언을 금당터 기단 아래의 용혈구멍으로 실증한 감은사터 발굴은 우리 기술, 인력으로 이뤄낸 고고학 조사의 효시가 되었다. 그뒤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1969년)과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75년~87년)에 봉직하면서 40여년간 나라를 대표하는 고대 유적과 고건축의 발굴, 복원과 연구에 심혈을 쏟았다.

숭례문 해체복원(1960년대 초반), 불국사 복원(70년대 초반)에 이어 경주 천마총(74~75년), 황남대총(73~75년), 황룡사터(76~83년), 익산 미륵사터(80년대 초중반) 등이 고인의 손을 거쳐 새 역사로 되살아난 기념비적 유적들이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주관광개발계획 아래 진행된 경주 고적 발굴조사의 사령탑이었던 그는 대형고분과 천년 신라 궁터 월성의 발굴을 채근하는 박 전 대통령 앞에서도 문화유산 보존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섣불리 대형고분을 발굴하기보다 시험발굴이 필요하다고 건의해 중소형 고분인 천마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마도’가 출토됐고, 월성 대신 안압지를 발굴해 큰 성과를 거둔 일화도 유명하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 등 그와 함께 경주 유적을 조사했던 후학들은 “어떤 놀라운 유물이 나와도 눈 하나 까딱없는 차가운 항심이 고인의 장점이자 미덕이었다”고 떠올렸다.

고인은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퇴임 뒤 문화재위원과 한림대 사학과 교수,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조사단장 등을 지냈으며, 창산문화재 학술상을 마련해 인재 양성에도 애썼다.

수년 전부터 자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회고록과 국내 고고·건축사학계의 역할, 방향에 대한 소신을 정리하려 했으나 마무리를 못했다. 저서로 <한국의 유적을 발굴한다>(1977), <한국의 고건축>(1980) 등을 남겼다.

유족으로 부인 하상연(79)씨와 아들 김병곤(49·동국대 교수), 딸 김정숙(47)씨가 있다. 빈소는 동국대 일산병원이며 발인은 29일 오전 4시다. (031)961-9400.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공식 SNS [통하니] [트위터] [미투데이] | 구독신청 [한겨레신문] [한겨레21]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겨레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