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고침> 지방("위안부 피하려 조병창으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연합뉴스

"정신대 피하려 조병창으로…" 16살 소녀의 해방 기억

지영례 할머니 "마을 반장이 정신대 끌어갈 여자애들 이름 적어"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소년을 들쳐업은 사내들이 헐레벌떡 병원으로 뛰어들었다.

17살쯤 돼 보이는 앳된 소년의 어깨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한쪽 팔이 없었다.

"옷소매가 공장 기계에 말려 들어갔어요. 얼른 수술해야 합니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16살 소녀는 손을 덜덜 떨며 '외과' 도장이 찍힌 진찰권을 끊어줬다.

지영례(87) 할머니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43년.

'일을 하지 않는 젊은 여자 아이들을 정신대에 끌고 간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했다. 지씨는 학교를 그만뒀다.

"아직도 마을 반장이 정신대에 보낼 여자애들 이름을 적어 갔던 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들어간 곳이 일본군의 무기공장인 인천육군조병창이었다. 무기, 탄약 등의 제조·보급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지씨는 공장에서 탄환 등 군수물자를 만드는 친구들과 달리 조병창 내 병원 서무과에 배정됐다.

책상 앞에 앉아 내·외과 환자들이 오면 진찰권을 끊어주는 일이었다. 매일같이 무기를 찍어내던 무기공장에는 부상자가 즐비했다.

손가락이 잘리거나 다리가 절단돼 병원으로 실려오는 한국인 노동자도 많았다. 하루에 적어도 7∼8명의 환자가 그를 찾아왔다.

조병창 관리를 맡은 일본인들은 한국인 노동자들을 마구 부렸다. 잠시라도 일이 지체되면 군화를 신은 일본인 관리자가 와서 귀를 잡아챘다.

당시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공장에 가기 정말 싫었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조병창에서 일한 지 3년째 되던 해. 전투기가 뜨면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여전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때였다.

한국 사람들이 무기 공장에서 하던 일을 놓고 수군거렸다. 잠시 뒤 조병창 내 병원 서무과 반장이 "해방이다"라고 소리쳤다.

지씨가 살던 부평구 산곡동 뫼꽃마을에도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길을 돌며 팔을 위아래로 흔들고 춤을 췄다. 지씨가 기억하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던 그날이다.

지씨는 17살에 맞은 해방 후에도 결국 학교에 돌아가지 못했다.

"광복 후에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어.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나 그냥 시집 보내셨어. 식구 하나 덜려고…"

꽃다운 스무 살에 결혼한 지씨는 아들 둘과 딸 둘을 둔 지금까지 조병창이 있던 인천에서 지낸다.

그러나 해방 직후 어수선한 시기에 모두 헤어져 연락이 닿는 친구는 없다.

"그때 같이 공장에 들어갔던 동무 둘은 어떻게 지내는지…소란스럽던 때 뿔뿔이 흩어져 연락이 안 되니 알 수가 없지 뭐"

광복 70주년을 맞은 현재도 지씨가 일했던 인천시 부평구 산곡 3·4동 일대 일본 인천육군조병창은 부평미군부대 터에 남아 있다.

조병창이 지어진 뒤 수많은 조선인이 강제노역에 동원됐지만 아직 일본 측의 제대로 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군수 무기 업체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강제노역을 한 중국인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기로 중국 측과 합의했지만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 대해서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입장을 지난 7월 밝힌 바 있다.

chams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연합뉴스


연합뉴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