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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광복70년> 베이징 곳곳에 스민 단재 신채호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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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곳곳 떠돌며 상고사 연구·독립운동재편 '전력'

활동장소 대부분 사라져…단재 며느리 "정말 속상한 일"

연합뉴스

지난 8일 찾은 베이징(北京) 중심부에 있는 시청(西청)구 신문화(新文化) 스덩(石燈)후퉁. 단재는 이곳에 있었던 석등암의 여행객 투숙시설에서 반년 가량 생활했다. 현재 석등암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사진: 이준삼 특파원)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이었던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

옷이 다 젖는 한이 있어도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며 고개를 뻣뻣하게 든 채 세수를 했다는 그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단재는 일제에 체포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에 있는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했지만, 그의 항일투쟁 거점은 베이징(北京)이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베이징 지역 사찰을 떠돌며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고 중국신문인 '중화보(中華報)',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항일투쟁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

정부와 독립기념관·한국근현대사학회가 공동 발행한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단재는 베이징 보타암, 석등암, 관음사 등에서 기거하며 독립운동과 역사연구를 병행했다.

단재가 생활했던 장소 중 아직도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석등암이 유일하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석등암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석등암은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시청(西청)구 신문화(新文化) 스덩(石燈)후퉁에 존재했던 암자다.

단재는 1923년 1월 상하이(上海) 국민대표회에 참가한 뒤 9월께 베이징으로 복귀해 이듬해 2월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당시 이 암자에는 여행자 투숙시설이 있었다.

'국외 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는 "당시 신채호 처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립운동계 재편을 위해 국민대표회와 국민위원회 등에 힘을 쏟았으나 계획이 무산된 뒤 석등암을 찾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사 연구에 매진, '조선고래(古來)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썼다.

최근 만난 한 지역 주민은 "석등암이 없어진 지 수십 년은 됐을 것"이라며 "지금은 출입문 하나가 남아있다"며 말했다. 그러나 이 문이 실제로 석등암의 흔적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단재 삶의 자취를 찾던 과정에서 베이징에 거주하는 단재의 며느리 이덕남(71) 여사와 만날 수 있었다. 이 여사는 2000년대 중반 위암으로 생사를 헤매고 나서 베이징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는 단재의 활동 장소에 대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몇몇 장소가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재건축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며 "정말 속상하다"고 말했다.

단재 신혼집이 있었던 진스팡제(錦什坊街·골목 이름), 단재가 한국사 연구와 집필에 전념했던 보타암(1918년께), 머리 깎고 수도승이 됐던 관음사(1924년께) 등도 지금은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외치던 단재의 치열한 삶의 흔적들을 이제 베이징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셈이다.

이 여사는 단재문화예술추진위원회 등이 단재의 생전 활동 지역에 대한 가이드북 등을 제작하고 있고 8월이 되면 단재의 활동지역에 대한 답사도 진행될 것이라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우리 아이들은 반드시 알아야한다"며 "아이들을 데려와주는 게 무엇보다 고맙다"고 말했다.

js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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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덩(石燈)후퉁. 현재 석등암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 지역주민이 '석등암의 일부'라고 이야기한 '스덩후퉁 13번지' 출입문. (사진: 이준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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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선생과 부인 박자혜 여사. 박 여사 역시 투철한 독립운동가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며느리 이덕남 여사는 "남편(고 신수범) 뿐 아니라 손자까지도 똑같이 신채호 선생과 똑닮았다"며 "삼대가 붕어빵"이라고 말했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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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 시아버지의 국적 회복을 위해 수십년 간 법정 투쟁을 벌여야했고, 갑자기 나타난 가짜 '신채호 아들'과 지루한 소송전을 치르는 기막힌 일도 겪었다. 이 여사는 지금도 시아버지의 독립운동 흔적을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 이준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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