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단독]<광복70년> 도쿄대 교수 "폭력적 동원, 광범위하게 이뤄져"

댓글 7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강제동원, 입법조치로 해결 모색해야…한일 역사 교류 기대"

"일본 내 혐한 서적 우려…제대로된 정보 얻으려는 노력도 많다"

일제강점기 재일 조선인문제 연구 전공한 도쿄대 도노무라 마사루 교수 인터뷰

연합뉴스

도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교수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제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강제동원 문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재일조선인 문제를 연구해 온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는 한국의 광복 70주년, 일본의 패전 70주년을 앞두고 강제동원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 강제 동원이 조선총독부조차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할 만큼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그 피해는 당사자는 물론 남은 가족에게도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규정했다.

도노무라 교수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법적 해결이 끝났다'는 주장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일본 정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제언했다.

다음은 도노무라 교수와의 일문일답.

--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지만 이에 비해 그 밖의 강제 동원에 대한 관심은 덜한 것 같다.

▲ 식민지 시대 한국인이 가장 괴로움을 겪은 것을 하나 꼽자면 쌀 공출이고 다른 하나가 강제노동이다. 쌀 공출은 대부분의 한국 민중에게 생활에 가장 직결된 것이었다. 먹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강제동원은 이른바 집안의 기둥을 끌고 가 근간인 노동력을 뺏는 것이며 농업 자체에도 큰 타격을 줬다.

--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나.

▲ 조선총독부 관리는 두 가지 불만(공출, 강제동원)을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억눌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군대 출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쟁을 조금 더 오래 했다면 관청이 습격당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로 심한 문제였다.

-- 동원된 인원은 얼마나 되나.

▲ 일본 내지(현재의 일본에 해당하는 곳), 남양군도, 사할린에 보낸 수를 합하면 72만 명 정도라고 한다. 이는 일본의 동원 계획으로 내보낸 것이며 그 이외에 군인이나 군속(군무원)으로 보낸 사람이 있다. 한반도 남쪽에 있는 사람을 북쪽의 탄광이나 광산에 보낸 것도 있으며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총독부는 그렇게 많이 보낼 수 없다고 했으나 일본 중앙정부가 '안 그러면 전쟁에 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보낸 것이 실정이다. 즉 조선총독부가 보내기 싫어할 정도로 많은 사람을 보낸 것이다.

-- 강제 동원 피해의 심각성은.

▲ 우선 폭력, 강제의 문제가 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데려가거나, 당시 일본 공문서에도 쓰여 있는데, 납치와 마찬가지로 데려가거나 하는 폭력성이 있다. 노동 현장에서는 때리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일할 수 없을 때도 위협해 일하게 했다. 먹을 것도 부족했다. 조선인이라서 그렇게 했는지 사실은 알 수 없다. 당시는 조선인이라서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있는 모두가 식량이 부족했다. 때려서 일 시키는 것은 조선인이므로 특별히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꽤 크지만 때리면서 일을 시키는 것은 일본인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도 이뤄졌다.

-- 왜 그런가.

▲ 탄광이나 토건 현장을 야쿠자(조직폭력단원 등) 같은 사람들이 지배하며 때리면 일을 시킨 것이다. 전쟁 중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의 탄광은 전쟁 전부터 그랬다. 누구도 (거기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전쟁 전에는 죄인을 데려와서 노동을 시키던 현장이었다. 사람이 부족하므로 조선인을 데려와서 일을 시킨 것이다. 지옥 같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데 그 말이 맞다. 탄광이나 토목공사, 항만·도로 부문은 인력이 모이지 않으므로 그런 곳에 조선인을 배치했다. 일본인도 징용했으나 일본인을 그런 곳에 배치하지 않고 조선인을 야쿠자가 때리면서 부리는 노동 현장에 배치한 것은 정책적 차별의 문제였다.

-- 강제연행, 강제노동 등 여러 가지 용어가 있는데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가.

▲ 강제연행이라고 하면 모집할 때만의 강제성을 얘기하는 것이 돼버리고, 강제노동이라고 하면 노예적 노동이 있었다는 것만 나타낼 수 있다. (배치에 관한) 정책적 차별이 있었다는 것과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 등에 관해) 국가가 책임을 진다고 해놓고 그러지 못한 것 등을 다 생각하면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당시의 용어로는 '정책적 노무동원'이라는 것이 있다. 강제적으로 했다는 것과 일본인과 비교해 차별이 있었다는 것, 국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 최근 일본 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동원에 관해 협의의 강제연행, 넓은 의미의 강제성 등에 관해 여러 얘기가 있는데 방금 얘기한 '정책적 노무동원'의 강제성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맞나.

▲ 폭력적인 동원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스스로 원해서 탄광 동원에 응한 사람도 있다. 72만 명이 있다고 하면 72만 명 전원이 폭력적으로 '가라'는 얘기를 듣고 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꽤 널리 폭력적인 동원이 이뤄졌다는 것은 틀림없다. 광범위하게 납치와 비슷한 동원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고 (일제 강점기) 가장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동원을 피해) 숨어 있는 상황이 됐다.

-- 최근 일본에서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사례가 자주 확인되는 데 관련 분야를 연구한 학자로서 어떻게 진단하는가.

▲ 일본인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 근현대사 역사학자라면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강제연행은 없었다거나 식민지화를 조선인이 기뻐했다는 등 '혐한'(嫌韓) 서적에 쓰여 있는 내용의 영향은 있다. 매우 우려스럽다. 우선 원래 학교 수업에서 그런 것을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최근 일부에서는 그런 것을 가르치면 가르치지 말라고 학부모가 얘기하거나 일부 언론이 지적하거나 해서 가르치기 어렵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황에서 서점에 가보면 성실하게 연구한 책은 잘 보이는 곳에 진열돼 있지 않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혐한 서적을 (보고서 등에) 참고문헌으로 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 매우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 최근에는 혐한 서적에 너무 같은 얘기만 있고 어처구니없다는 인식도 확산하고 있다. 열심히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도 있으므로 완전히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외로 현재의 20대들이 괜찮다는 얘기도 있다.

-- 실제로 학교에서 그렇게 느끼나.

▲ 이곳(도쿄대)은 조금 특수한 곳이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은 스스로 선택한 경우가 많으며 내가 쓴 책을 찾아보고 오는 학생도 있다. 내가 접하는 일본인 학생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 같은 것은 이상하다는 의식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 강제동원 피해자나 유족은 배상·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고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인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어떤 견해인가.

▲ 기본적으로 일본 내에서는 관련 재판이 끝났고 판례가 확립됐다. 여러 피해가 있었다는 것이 얘기됐다. (법원은) 강제 연행이 없었다거나 폭력적인 동원이 없었다거나 임금이 전부 지급됐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법원 측은 판결할 때 뭔가 다른 형태로 해결하라고 했다. 입법을 통한 해결을 생각하라고 얘기했다. 게다가 피해자는 지금 80∼90대뿐이다. 입법 조치로 뭔가를 생각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일본 정부에게도 나쁘지 않다.

-- 강제연행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 한국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일본을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유는.

▲ 전쟁 중 일본제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일하므로 제대로 수당을 주고 노무 관리도 잘 한다고 약속해놓고도 지키지 않았다. 어려운 일을 평등하게 나누지 않고 힘이 약한 조선인에게 강요했다. 그런 정책을 행한 것이 일본 제국이었다는 것,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국가라는 것, 국민을 소중히 하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알고 일본제국이라는 존재 방식을 중단하고 새롭게 출발한 것이 현재의 일본이다. 한국으로부터 지적당해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이라는 것이 어떤 나라였는지 일본인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이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

-- 한국은 광복 70년을 앞두고 있다. 강제동원의 상처를 극복하고 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한 제안을 한다면.

▲ (강제동원에 관한) 일본 정부 차원의 조사를 못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적극적인 사람이 많은 정권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 문제도 좋은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전쟁 중 조선인 노동자가 처한 환경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은 물론 외국에서도 방문자가 많아질 것이므로 안내하는 현지인도 이 문제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이를 계기로 공부하게 되면 좋겠다. 정부 수준에서 안 되면 지방자치단체끼리 교류하면 좋겠다. 조선인이 일하던 시설이 있는 일본의 지자체가 매년 한국인을 초대하거나, 아니면 그 지역의 일본인이 한국에 학습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다.

-- 한국의 독자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 일본인은 전부 지독한 짓을 했다는 단순한 이미지로 받아들이면 역으로 일본에서도 '역시 한국은 반일(反日) 아니냐'고 하게 된다. 그러면 수업에서 강제연행 문제를 생각하자고 얘기하려고 해도 '왜 한국처럼 반일적인 시각을 취하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 세상에는 일본과 한국이 옥신각신해서 좋은 사람도 있다. '혐한' 서적을 쓰는 사람은 양국이 다투지 않으면 소재가 없어져 버린다. 그들의 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한국 쪽은 '조선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매우 즐겼던 일본인밖에 없었다'는 식의 단순한 이미지로 얘기하는 것을 조심할 필요는 있다. 물론 기본적 일본인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취재보조: 이와이 리나 통신원)

※도노무라 마사루 = 1966년생. 와세다(早稻田)대 제1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고 2001년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음. 1999∼2000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에 외국인 연구원으로 머물렀음. 일제 강점기 재일 조선인 등을 주로 연구했음. 저서로는 '조선인 강제연행' 등이 있음. 2007년부터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준교수로 근무했고 올해 초부터 같은 과 교수로 재직 중.

sewonle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연합뉴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했던 근로정신대 소녀들의 모습.(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연합뉴스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나가사키시에 있는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의 나가사키 조선소 내에 설치된 크레인이 인근 언덕에서 내려다보인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강제 노역에 시달린 시설이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