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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20대 청년이 겪은 조선족 보이스피싱 사기단 탈출기 “중국 골방서 서울지검 수사관 행세…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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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500만원 꾐에 중국행… 결국 받은 건 일주일 5만원”

“죄책감에 실적도 떨어져… 어머니에 알려 한국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던 이모씨(27)에게 보이스피싱 조직의 검은손이 뻗쳐온 건 지난 1월 초다. 이씨는 가깝게 지내던 선배로부터 안모씨(33)를 소개받았다. 안씨는 “중국에서 돈을 투자해서 대박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안씨는 이씨에게 “임원을 시켜주고 지분도 주겠다. 적응 기간 동안 한국어로 전화 상담해주는 일을 하면 된다”고 했다. 안씨는 “한 달에 300만~500만원은 벌 수 있고, 합법적인 일”이라고 했다. 이씨는 큰돈을 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1월17일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한 이씨를 맞은 곳은 지린성 옌지시 한 아파트 5층에 설치된 콜센터였다. 25평쯤 되는 아파트에 방 세 개, 화장실은 두 개였다. 거실에는 컴퓨터 두 대, 전화 세 대가 설치돼 있었다. 낙후된 시설에다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이씨는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씨에게 주어진 건 전화로 한국에 있는 사람들을 꾀어 돈을 뜯어내는 일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운영하는 콜센터에는 조선족 4명, 한국인 5명이 일했다. 조직은 이씨에게 300위안(약 4만~5만원)을 주급으로 줬다. 그나마 떼먹는 일이 많았고, 밥값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씨는 밥값을 아끼려고 대부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날부터 이씨는 서울중앙지검 지능범죄수사팀 권민재 수사관이 됐다. 가공의 인물이었다. 조직은 매뉴얼을 들이밀며 전화를 걸라고 했다. 이씨는 전화를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여기는 서울중앙지검이고요. 저는 지능범죄수사팀 권민재 수사관입니다….”

경향신문

조직원들은 수사관과 검사 역할로 나눠 “당신의 계좌가 금융사기 범행에 이용됐다”고 피해자에게 겁을 줬다. 수사관 역할을 맡은 이씨가 피해자를 꾀어내면 이씨 뒤에 대기하던 다른 조직원이 “서울중앙지검 이건우 검사”라며 계좌번호와 비밀번호, 보안카드 번호를 묻는 식이었다. 조직은 피해자를 안심시키려고 가짜 검찰청 홈페이지까지 만들었다. 검사 역을 맡은 조직원은 피해자에게 ‘금융감독원이 관리하는 안전계좌’로 직접 입금을 유도하기도 했다. 물론 허위 계좌였다.

피해자가 수사관 및 검사 역할의 조직원에게 속아 개인정보를 가짜 검찰청 홈페이지에 입력하면, 다른 조직원은 피해자 계좌의 잔액을 빼돌렸다. 이들은 이런 수법으로 13명에게서 7200여만원을 가로챘다. 추적을 피하려고 1~2개월 단위로 콜센터를 옮겨다녔다.

이씨는 범죄를 저지른다는 죄책감에 실적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보복이 두려웠다. 실적이 부진하자 조직은 이씨를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다른 센터에 넘겼다. 이씨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갑자기 차에 태워져 다른 센터로 보내졌다. 옮겨간 콜센터는 잠잘 방도 마땅치 않았다. 이씨는 퇴근 후 의자를 여러 개 붙여 잠을 잤다.

한국에 영영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씨는 몰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비행기표를 받았다. 기회를 보던 이씨는 3월초, 조직원들이 아침에 출근하기 전 택시를 잡았다. 아껴둔 수당은 택시비로 썼다. 센터에서 옌지공항은 30분 거리였다. 가까스로 탈출해 한국으로 온 이씨는 자신을 속인 안씨가 다시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접근하자 경찰에 제보했다.

한국에 도착한 이씨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확천금에 눈이 멀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이씨는 현재 취업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전화를 걸어 상대를 속이고 돈을 가로챈 혐의(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위반)로 최모씨(28) 등 보이스피싱 조직 일당과 이씨를 중국에 보낸 안씨를 구속했다고 6일 밝혔다.

<배장현 기자 sayi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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