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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핫소스 김치’처럼 맵고도 맛있던, 그 시절 엘리너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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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희호 평전] 제1부 학업시대-7회 미국 유학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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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유학은 가고 싶은데 돈이 없었다
2년간의 수소문 끝에
미국 기독교단체 도움을 받아
4년 장학금과 비행기표를 얻었다

램버스대학 2년, 스캐릿대학 2년
영어 때문에 죽을 맛이었고
공장 알바로 생활비를 벌었다
공부에 치이고 외로움에 치였지만
한국 유학생들과 만들어 먹던
양배추+핫소스 김치는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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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오른 이희호는 남부 테네시주 잭슨카운티의 램버스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멤피스 감리교회 쪽에서 4년간 장학금을 받았지만 집안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기에 여름방학 때마다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전기코일 공장에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1956년 여름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헤어지면서 ‘수복강령’이라는 글씨를 써서 선물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가운데 이희호가 입고 있는 저고리와 치마 역시 손수 지은 것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가 유학을 떠난 것은 1954년 8월이었다. 유학을 결심하고 용기를 내는 데는 미국에 살던 외삼촌 이원순의 도움이 컸다. 이원순은 일제강점기에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뜻이 맞지 않아 이승만과 헤어졌다. 이원순은 해방 뒤인 1947년 조국에 돌아와 한동안 머물렀다. 이희호는 외삼촌을 만나 미국 유학을 가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외삼촌은 조카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주었다.

부산 피란 시절 이희호는 미국으로 돌아간 외삼촌에게 편지를 써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돈이 없던 때니 유학을 가려면 스칼러십(장학금)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1952년 여름 외삼촌으로부터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미국 주재 한국대사 양유찬 박사가 여학생용 스칼러십을 여러 개 가지고 한국으로 나가는데 네 얘기를 해놓았으니 찾아가 봐라.”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이희호는 양유찬이 머물고 있던 경남도청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양 대사가 하는 말이 외삼촌은 스칼러십을 또 보내줄 수 있는 분이니 이번 것은 처지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양보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예요.”

이희호는 아쉬움이 컸지만 곤궁한 학생에게 기회를 주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 뒤 외무부에 근무하는 면우회 회원을 만났더니 ‘지금 고위층 딸들이 그 스칼러십으로 유학 수속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해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외삼촌에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시 부탁하니 ‘재정보증’ 서류를 보내주셨어요. 재정보증 얻는 게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재정보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칼러십을 제공하는 대학을 찾는 일이었다. 시간은 가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대학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희호는 먼저 미국으로 유학 간 친구 김봉자에게 편지를 썼다. 1953년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직전이었다. 김봉자는 면학동지회 회원이었고 이희호와 절친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김봉자는 한국전쟁 중 대구의 미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당시 정훈국의 군목으로 있던 제임스 크로가 김봉자의 성실함을 높이 사 유학길을 열어주었다.

친구의 편지를 받은 김봉자는 크로 목사에게 친구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고향에 돌아가 있던 크로는 미국 남부 테네시주 멤피스의 감리교회 44곳의 남성클럽 회장인 변호사 클리퍼드 피어스에게 ‘이희호’라는 한국 여성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 “선교사 10명을 한국에 파견하는 것보다 한국 학생 한 명을 공부시켜 보내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낼 것입니다.” 피어스는 남성클럽을 움직여 4년 동안 공부할 장학금을 모으고 미국행 비행기 표까지 마련했다.

이희호는 유학 수속을 마쳤다. 미국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던 중 제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투표일은 1954년 5월20일이었다. 이희호는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박순천 후보의 선거 지원 요청에 응했다. 박순천은 제2대 민의원 선거 때 대한부인회 대표로 나와서 당선된 현역 의원이자 이희호가 여성문제연구원을 만들 때 지도자로 모신 사람이었다. 박순천의 상대 후보는 윤보선이었다. 이희호는 박순천 캠프에서 지프차를 타고 날계란을 먹어가며 “여성은 여성에게 투표합시다” 하고 길거리 유세방송을 했다. “나는 당시 정치에 관심이 많아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지요. 하지만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박순천은 아깝게 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여성문제연구원 활동이 낙선의 원인이 됐다. 여성문제연구원은 남녀평등 차원에서 간통죄에도 쌍벌제를 적용할 것을 건의했다. 잘못은 같이 했는데 여성만 처벌받아서는 안 되며 남성도 함께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순천은 이 건의를 받아 쌍벌죄를 발의했다. 쌍벌죄 법안은 1953년 6월 국회를 통과했다. 바로 이 법이 문제가 됐다. 종로3가의 홍등가 여성들이 쌍벌제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며 박순천을 외면했다.

이 3대 민의원 선거 때 김대중도 정치에 발을 들였다. 청년 사업가 김대중을 정치로 이끈 사건은 1950년 한국전쟁과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었다. 김대중은 인민군 치하에서 ‘반동’으로 체포돼 처형 직전에 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한민족 전체의 재앙이었다. 정치의 실패가 동족상잔을 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구하려면 정치를 바꿔야 했다.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의 재선 욕심이 일으킨 정치적 난동이었다.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로는 대통령 재선이 불가능해지자 정치깡패와 폭력경찰을 동원해 국회를 장악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부패 권력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김대중은 목포지역 노동조합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자유당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찰을 시켜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협박해 김대중 지지를 철회시켰다. 김대중은 첫 도전에 실패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김대중은 이듬해 한국노동문제연구소의 주간을 맡아 노동문제를 연구하고, <사상계> 1955년 10월호에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라는 논문을 실었다. 김대중은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완전히 모당(자유당)의 한낱 예속물의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노동조합이 환골탈태해 사회개혁의 진지가 되어야 한다고 썼다.

1954년 8월15일 이희호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노스웨스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비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돈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마련했다. “나는 아버지나 오빠들한테는 손을 내밀지 않았어요. 도움을 받지 않았으니까 간섭도 받지 않았지요.” 떠나는 날 아버지가 여의도비행장에 나왔다. 아버지는 딸의 유학을 뿌듯하게 여겼다. “네 힘으로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게 되다니 기쁘고 장하다.” 아버지는 딸이 자기 꿈을 대신 이루어주었다며 고마워했다.

노스웨스트 비행기 안에는 이희호 말고도 유학 가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희호는 유학을 간다는 기쁨보다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두고 떠난다는 비감이 더 컸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 “초행이었지만 두려움은 없었어요.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요. 그런데 학교에 도착해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오더라고요.”

그 시절엔 미국으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없었다. 이희호는 도쿄에서 미국행으로 갈아탔다. 이어 시애틀에 도착해 국내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까지 갔다. 다시 기차를 타고 텍사스주 샌안토니오로 가 유학길을 열어준 은인 제임스 크로를 만났다. “기차 안이 한여름인데도 참 시원했어요. 에어컨이라는 게 있다는 걸 몰랐지요.”

이희호는 8월말 테네시주 잭슨 카운티에 있는 램버스대학에 첫발을 디뎠다. 장학금을 제공한 테네시주 멤피스의 감리교회 남성클럽이 지정해준 학교였다. 특별학생으로 영어 코스를 밟으며 사회학을 공부했다. “전쟁 중에 사회운동을 경험한 것 때문에 전공을 사회학으로 했지요. 사회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나이 든 새내기 유학생 이희호는 처음 1년 동안 영어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다.

“남부 사투리까지 섞여 있어서 도무지 말을 알아먹을 수가 없었어요. 숙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매번 밤샘을 하다시피 했지요. 램버스대학에 임은숙이라는 먼저 유학 온 학생이 있었어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군목이 양녀로 삼아서 미국으로 데려갔는데, 이 친구는 양부모 집에서 지내다 대학에 왔기 때문에 영어를 잘했어요. 후배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니 나는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요.”

학과 공부에 시달리고 외로움에 치이니 고국에서 온 편지만 보아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교회에 나가면 한국 고아들 돕자고 모금을 하는데 피란 시절 기록필름을 보여줘요. 그걸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생각이 나서 또 눈물이 났어요.”

용돈이 궁하던 이희호는 램버스대학에 있던 동안 여름이면 두 달씩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은 테네시주에서 멀리 떨어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있었다. 하루 여덟 시간씩 전기코일을 감고 잔글씨를 써넣었다. “처음에는 한 시간에 1달러씩 주었어요. 하숙비 제하고 나면 조금 남아요. 그다음에는 1달러 50센트, 나중에는 1달러 80센트를 줬어요.”

이희호는 글을 써서 상금을 받기도 했다. 1955년 여름에 ‘대학 캠퍼스의 음주 문제’라는 주제로 미국 대학생 에세이 콘테스트에 응모해 가작으로 입상했다. 5달러를 받았다. “전교생이 모인 데서 그 5달러를 주는데요, 다들 놀라요. ‘쟤는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면서요.” 이어 캐나다에서 열린 북미 전역 경선에서도 1298편 중 최종 50편 안에 뽑혀 25달러를 상금으로 받았다. 구두 한 켤레가 5달러였으니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퍼스트레이디이자 인권투사였던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난 순간
손이 따뜻했다, 아직도 느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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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가을 테네시주 내슈빌의 스캐릿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이희호는 흑인교회 관찰 보고서를 써내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사진은 1958년 5월 스캐릿대학 대학원 졸업식 때로 오른쪽이 이희호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램버스에서 2년을 보낸 뒤 1956년 테네시주의 주도 내슈빌에 있는 스캐릿대학으로 옮겨 석사과정을 밟았다. 램버스에는 석사과정이 없었다. 스캐릿대학 생활은 램버스 시절보다 한결 쉬웠다. 우선 이 대학에는 한국·일본·인도 같은 아시아에서 온 여학생이 많았고, 이화여대 동문들도 있었다. 친구 김봉자를 다시 만난 곳도 그곳이었다. 이 대학 맞은편에는 교육전문대학인 피바디대학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울대 사범대 교수와 동문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또 피바디대학 옆의 남부지역 명문 밴더빌트대학에도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뒤에 스캐릿과 피바디는 밴더빌트에 흡수돼 단일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내슈빌의 한국 유학생들은 한달에 한번씩 모였어요. 스캐릿·피바디·밴더빌트의 유학생이 다 모이면 40명쯤 됐어요. 다들 기독교인이라 함께 예배를 보고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었지요. 양배추에 핫소스를 뿌려 김치를 담가 먹었는데 흉내만 낸 김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희호는 석사과정을 밟는 동안 흑인사회를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도 얻었다. 사회집단 한 곳을 정해 지속적으로 관찰한 뒤 보고서를 써내는 커리큘럼이었다. 이희호가 선택한 곳은 흑인들이 다니는 교회였다.

“내가 떠나온 한국의 시골과 실정이 비슷해서 일부러 흑인교회를 택했어요. 일요일마다 흑인들이 사는 집에 가서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예배까지 보고 왔지요. 그 시절에 남부는 흑백 차별이 심했어요. 흑인은 버스를 타더라도 뒷자리로 가야 하고, 앞자리는 백인 차지였어요. 하루는 우리 학교에 흑인학교 학생들이 와서 합창을 하는데 눈물이 막 나와요. 그네들이 차별받는 게 다 느껴지니까요. 흑인들도 같은 인간인데,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지요.”

이희호는 흑인교회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써 석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에 이희호가 읽고 공부했던 사회학·여성학·종교학·문학 관련 책 100여종의 목록이 남아 있다. 그 목록에 여성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루스 베네딕트의 저작도 다수 들어 있다.

이희호가 스캐릿에서 겪은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은 32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난 일이었다. 엘리너는 남편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동안 자기만의 의제를 따로 내걸고 사회활동을 했다. 특히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엘리너는 루스벨트가 죽은 뒤에도 인권운동가로서 열정을 다해 활동했고, 미국의 유엔 대사로 파견됐다. 유엔인권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돼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주도한 것은 엘리너의 최대 업적이었다.

엘리너는 1957년 12월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내슈빌을 방문했다. 이희호는 설레는 마음으로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엘리너는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했는데 기품이 있었어요. 엘리너가 내민 손이 따뜻했지요. 그 감촉이 잊히지 않아요.” 인권 투사 엘리너의 모습은 이희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엘리너의 강연이 끝나고 난 뒤 한국 유학생들은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렸다. 이희호는 피바디에 유학하고 있던 여학생 이영식과 함께 한국춤을 추었다. 과거 연극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영식이 여자 역을 맡고 이희호는 남자 역을 맡았다. “남학생이 한복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빌려 입었어요. 무대에서 한복을 입고 춤을 춘 건 처음이었지요.”

이희호는 1958년 5월 스캐릿대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박사과정을 밟고 싶었지만 감리교회 남성클럽에서 정해준 유학 기한이 다 돼 더 있을 수가 없었다. 그해 8월15일 이희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서른여섯이었다.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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