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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한번 가볼까”… 그렇게 시작된 서울 - 부산 25년 무료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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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조범구 한국심장재단 이사장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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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구 이사장은 “한국심장재단 개인 후원자 중 40%는 재단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은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기부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재단 마크처럼 두 팔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조 이사장은 “생전 처음 해본다”면서도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한국 농구의 전설’ 신동파(71)는 전성기 때 한 경기, 한 대회 슛 성공률이 무려 90%였다. 점프슛을 87개 연속 성공시킨 적도 있다. 한마디로 득점기계였다. 그는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ABC) 결승에서 필리핀을 상대로 50점을 터뜨리며 한국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는 올 초 한 인터뷰에서 후배들에게 따끔한 조언을 했다.

“요즘 국내 농구를 보면 총점 60점대 스코어가 나오거나 오픈 찬스에서도 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프로라면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팬들이 경기장을 찾는다.”

의술에서 신동파 뺨치는 사람이 있다. ‘한국 흉부외과의 전설’ 조범구 한국심장재단 이사장(76)이다.

“수술 성공률 90%? 100명 중 10명은 죽는다는 얘기인데, 그게 말이 되는가. 100명 다 살려야지. 모두 소중한 생명이고,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다. 다른 수술과 달리 심장수술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100명, 1000명 다 살린다는 각오로 수술해야 한다. 그 때문에 흉부외과 의사는 완벽해야 한다. 집도의가 처음부터 환자 10%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조범구 이사장은 국내 선천성 심장기형 수술 분야의 개척자다. 그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76년 미국 흉부외과 학술원 초청 펠로(전 세계에서 1년에 1명 선발)로 미국에서 첨단 심장수술법을 익히고 돌아왔다.

“당시 나는 한국에서 심장수술을 1주일에 한 건 정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스턴 심장센터에서는 9개 수술장에서 하루에 30건씩 수술을 했다. 입이 떡 벌어졌다. 미국연수 시절 휴스턴을 비롯해 앨라배마대, 하버드대, 메이요 클리닉 등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많은 걸 배웠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심장 전문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세브란스 재단에 계속 요청하고 차관을 얻고…. 지금의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은 그렇게 해서 드디어 1991년 문을 열었다.”

심장병은 크게 두 종류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기형적인 경우와 살아가면서 심장에 탈이 나는 경우다. 선천성 심장병은 종류가 많은데 10명 중 9명은 수술만 하면 일생동안 무리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수술에는 적기가 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선천성 심장 기형은 사춘기 전에 수술해야 한다. 감기에 자주 걸리는 등 여러 가지 징후가 있는데, 어릴 때 병원에 가면 대개는 소아과 의사들이 체크할 수 있다. 그 직후 바로 전문의를 찾아 정확한 진단과 수술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장은 선천성, 후천성 모두 생명과 직결돼 있다. 운동 운전 목욕 중 급사, 돌연사 등은 모두 심장질환과 관련이 있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질환이 관상동맥(심장 근육의 동맥)에 이상이 생기는 협심증이다.

“예를 들어 수도관이 녹슬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듯, 관상동맥에 기름기가 많이 끼면 산소와 영양분이 잘 전달되지 않고 혈전이 떨어져 나가는 등 심장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뇌는 혈관에 이상이 생기면 의식은 잃지만 살아있을 수는 있다. 최소한 치료할 시간은 벌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은 멈추면 그것으로 끝이다.”

조 이사장은 ‘심장병 어린이의 아버지’로 불린다. 1978년부터 매달 한차례씩 25년간 부산 메리놀병원 심장환자 상담소로 무료왕진을 다녔다. 그가 진료한 어린이 환자(환아)는 3만여 명에 이르고 수술 받은 아이만도 2000여 명을 넘어선다. 그는 아직도 메리놀병원 강당에 모여 있던 환아들과 그 부모와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다.

“그해(1978년) 어느 날 메리놀병원의 김 미카엘라 수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부산에 어린이 심장병 환자가 많으니 꼭 내려와서 봐달라는 것이었다. ‘어디 한번 가서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내려갔다. 강당은 어린 환자 100여 명과 그 부모 등 수백 명으로 가득했다. 혈액순환이 잘 안돼 입술이 파래지는 청색증이 분명한 환아가 수두룩했다. 그 아이들의 눈망울과 부모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거창하게 ‘의사로서의 사명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도저히 못 본 척할 수가 없었다.”

조 이사장은 투철한 봉사정신으로 영세민과 의료취약지역 주민의 건강증진에 헌신해온 의료인에게 수여하는 제19회 보령의료봉사상을 2003년에 받았다. 본인은 겸손해하지만 ‘부산 무료왕진 25년’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식비와 차비 등은 모두 자비였다. 최고의 심장기형 전문의가 왕진을 하는데 어느 정도 지원은 받아도 되지 않았을까. 병원과 요양소에 후원금이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후원금은 그런데 쓰는 게 아니다. 후원금은 오로지 환자만을 지원하는데 써야 한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빼내 쓰다 보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런 그의 소신은 2010년 한국심장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에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한국심장재단은 2013년 삼일투명경영 대상(의료부문)을 받기도 했다. 심장병 환자를 돕는 재단은 전국에 많다. 그중 55개 종합병원과 계약하고 있는 한국심장재단이 후원 규모에서 가장 크고 네트워크도 전국적이다. 1년에 10억 원대이던 후원금이 조 이사장 부임 이후에는 30억 원대로 늘었다.

“2014년 1102명의 환자에게 39억 원의 진료비를 지원했다. 한국심장재단은 후원금을 전액 환자지원사업에만 사용한다. 후원자들도 재단의 건전성 여부를 꼼꼼히 살펴본 뒤 후원 여부를 결정한다. 후원금을 내는 사람과 회사 입장에선 어디에 쓰는지, 제대로 쓰는지 알 권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 재단은 1년에 4번 소식지에 후원 명세를 싣고 소액 후원금액까지도 그 후원자 이름으로 세무서에 신고한다. 후원자는 연말 정산 때 자동적으로 세금 감면을 받게 된다. 우리 재단과 연계된 계약병원에서는 선택진료비를 20%만 받고 있다. 이번 기회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그동안 계약병원에서 부담한 비용을 추산해 보면 120억 원이 넘는다.”

조 이사장은 연세대 의대 시절, 선배와 교수로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무척 엄했던 걸로 정평이 나있다. 그때 무수하게 ‘조인트를 까인’ 후배와 제자들은 아직도 ‘조범구’를 어려워한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로서, 후학들은 물론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조 이사장이 유일하게 ‘관대한’ 영역이 있다. 바로 어린이 심장병 환자 지원 대상 선정기준이다.

“젊은 부부와 그 자녀는 우리나라의 기둥이며 미래다. 월수입이 어느 정도 되더라도 도와주라고 한다. 자동차 소유 여부도 조사 항목에서 빼라고 했다. 요즘 시대에는 안 맞는 기준이다. 아직 경제적으로 안정이 안 된 젊은 부부가 조금 갖고 있는 돈마저 아이 심장병 수술비로 홀랑 다 써버리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 수술 후에도 한번에 몇 십만 원짜리 초음파를 찍어야 한다. 우리 재단은 1년에 초음파 촬영권 수백 장을 환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2014년 말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은 150만 명을 넘어섰다. 다문화사회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한국심장재단은 외국인 심장병 환자의 수술비도 지원하고 저개발국 의료진에 대한 연수교육도 실시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지원대상이 ‘한국인’으로 제한돼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을 도와줄 수 없었다. 1990년부터 중국 환자 수술비 지원을 시작해 2014년까지 29개국 환자 708명에게 수술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런 지원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저개발국 의료진을 직접 교육시켜 자국 어린이들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게 만들자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조 이사장은 요즘 한국심장재단 기금 확충 방안에 골몰하고 있다. 북한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평균 신생아의 0.8∼1%가 심장기형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여건이 안 맞아 북한 심장병 어린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를 대비해 기금을 확충해야 한다. 1년에 후원금이 100억 원 정도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매년 수술비 지원도 늘리고 나머지는 꾸준히 축적해야 한다. 현재 재단 기금은 400억 원이 넘는다. 그건 현재 정관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돈이다. 하지만 나중에 북한 어린이들을 도와주게 되면 헐어서 써야하지 않겠는가.”

그가 메스를 놓은 지는 꽤 오래됐다. 하지만 ‘사랑의 메스’를 놓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흉부외과 심장전문의로서 수천 명의 어린이에게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은 조범구 박사. 현역 은퇴 후에는 한국심장재단 이사장으로 또 다른 심장 구하기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그는 영원한 ‘하트♥ 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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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범구 이사장(왼쪽)이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원장 시절, 회진 중에 어린이 환자를 보듬어 주고 있다. 한국심장재단 제공


▼흉탄에 날아간 ‘어린이 심장재단’ 陸여사의 꿈▼

10년 앞당길 수 있었던 심장재단


1983년 한국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부부가 전용기 에어포스원 트랩을 오르고 있었다. 낸시 여사

품에는 한 아이가 안겨 있었다.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던 한국 어린이였다.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함께 출국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그러자 “한국은 아직 심장병 수술 능력도 없느냐?

어찌 심장이 아픈 애를 심장에 무리를 주는 비행기에 태워 외국에 보내느냐?”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이에 1984년 이순자 당시

대통령 부인의 주도로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기 위해 ‘새세대심장재단’이 설립됐다. 1989년 ‘한국심장재단’으로

법인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심장재단 설립은 이미 10년 전인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조범구 이사장은 “1974년 봄 중앙정보부에서 2명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 부인께서 어린이를 위한 심장재단을 만들려고 하는데,

국내 심장병 어린이 환자 현황 등 자료가 필요하다고 해 알려줬다. 그런데 그해 8·15 기념식장에서 육 여사가 변고를 당하는

바람에 더이상 진척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 시에 설립된 탓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심장재단 관계자들은 각종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재단이 재산은닉처로 사용됐을 가능성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조 이사장은 “수상한 돈은 한 푼도 안나왔다고 한다. 그동안 재단을 맡으셨던 분들이 철저하게 잘하신 것 같다. 현재 한국심장재단은 과거 정권 인사들과는 전혀 무관한 비영리재단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지원금 없이 순수하게 민간 후원금만으로 운영해 온 한국심장재단은 2014년 말 기준으로 30년간 총 3만2013명의

환자들에게 782억2000만 원의 수술비를 지원했다. 그동안의 후원자 총수는 연 12만여 명이다. 정기 후원자가 60%를 넘는데,

최대 후원자는 바로 ㈜오뚜기와 그 관계사 11곳.

오뚜기 창업자인 함태호 명예회장(85)은 “돈이 없어 수술

받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절박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1992년부터 심장병 어린이 수술비를 지원해 왔다. 그동안 약 71억 원(환자

3897명)을 후원했으며 2014년 한국심장재단이 모금한 후원금 32억7600만 원 중 오뚜기와 관계사가 낸 금액은

21%(6억9200만 원)에 이른다.

:: 조범구 이사장 약력 ::

▽1939년 3월 4일생 ▽서울중-서울고-연세대 의대 졸업(1964) ▽연세대 대학원 의학박사(1976) ▽미국흉부외과 학술원

초청 펠로(텍사스 심장연구소, 앨라배마대, 하버드대, 메이요 클리닉·1976∼1977) ▽연세대 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주임교수(1974∼2004)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원장(1991∼2000)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

병원장(2001∼2003) ▽연세대 의대 정년퇴임-명예교수(2004∼현재) ▽대한흉부외과학회 부회장, 회장,

이사장(1993∼1997) ▽제10차 아세아 심혈관외과학회장(2002) ▽미국흉부의사협회 국제회원(1993∼현재) ▽미국흉부 및

심혈관외과 학술원 정회원(1994∼현재) ▽대한민국 국방부 의무자문관(1981∼1996) ▽서울고등법원

조정위원(1998∼2004)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중앙심사위원장(2004∼2008) ▽정헌재단, 운경재단,

중외학술복지재단 이사, 아산사회복지재단 아산상 운영위원(현재) ▽사회복지법인 한국심장재단 이사장(2010∼현재)

수상

△청룡봉사상(1996) △보령의료봉사상(2003) △녹조근정훈장(2004) △몽골수교훈장(2007) △히포크라테스 휘장 수상(세계흉부외과학회·2008)

※한국심장재단 홈페이지(www.heart.or.kr) 또는 02-416-8763(내선 2번), ARS후원 060-700-1133(한 통화에 3000원)을 통해 정성어린 후원금을 전달할 수 있다.

안영식 전문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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