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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승만 암살' 위기일발 사진 뉴욕서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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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1952년 부산서 전 의열단원 유시태, 이 대통령 저격 불발 장면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권총 암살을 당할 뻔 했던 순간을 포착한 희귀사진이 20일 뉴욕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뉴욕한국일보에 따르면 이 사진은 뉴저지에 거주하는 김태진 국제지도수집가협회(IMCoS) 한국 대표가 소장한 '대한민국 방첩대(CIC) 사진첩'에 수록된 것으로 1952년 6월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린 '6·25 2주기 기념식' 연단에서 연설하는 이 대통령의 바로 뒤쪽에서 한 중년 남성이 권총으로 저격하려는 모습이 생생히 담겨져 있다.

사진 속에서 유시태라는 이 남성은 연단 뒤 귀빈석에서 뛰어나와 왼손에 쥔 권총을 하늘 쪽으로 들었다가 이 대통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채 연설 원고를 읽고 있으며, 호위하는 헌병 역시 앞을 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헌병 바로 옆에는 사진기자로 보이는 남성이 이 대통령의 연설을 촬영하고 있어 역시 저격 시도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의 연설이 시작되자 귀빈석을 박차고 나온 유시태는 불과 3m 떨어진 거리에서 두 차례 격발했으나 불발, 현장에서 체포됐고 이 전 대통령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이 사건 외에도 1948년과 1954년 등 3차례 있었지만 법정 사진 외에 저격 순간의 장면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대통령 저격이라는 역사의 현장이 담긴데다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앞에서 포착한 대단히 희귀한 사료로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 아래엔 영어로 "암살을 시도한 남성의 이름은 유시태로 이 전 대통령을 저격(Snipe)하려 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당시 김시현 민주국민당 의원이 이끌던 12인의 반정부 조직이 이번 사건을 주도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부산 충무로에서 벌어진 이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은 일제 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출신인 유시태(당시 63세)가 김시현(당시 70세) 민주국민당 의원과 공모한 것이다. 유시태는 김 의원의 양복을 빌려 입고 의원 신분증을 보여주고 귀빈석에 착석할 수 있었다.

사진이 수록된 사진첩은 붉은색 노리개가 달렸고 표지엔 육군방첩대의 영문 로고(ROKA CIC)와 함께 달을 배경으로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 음각 형태로 새겨지는 등 고급스럽게 제작됐다.

당시 김창룡 육군 방첩대장은 사진첩을 각각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공개된 것은 김태진씨가 런던의 한 고서화 전문점에서 구입했다.

사진첩엔 당시 인천 시장이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는 장면 등 여타 희귀 사진들과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1952년의 육군 방첩대 활동상을 다룬 것들이 수록됐다.

김씨는 "6·25 전쟁과 간첩 활동 등으로 혼란했던 격동기의 모습들이 사진들에 잘 나타나 있다"고 전했다. 김태진씨는 이 사진첩을 오는 6월 한국 코베이 경매에 출품할 예정이다.

한편, 유시태(1890∼1965)와 김시현(1883∼1966)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상하이 등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0여 년의 옥고를 치렀던 애국지사들이었다. 유시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진, 예산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해 투쟁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김시현은 1923년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할 목적으로 폭탄을 반입했다가 사전에 체포돼 12년형이 선고되는 등 일제에 의해 세 차례나 복역했다. 해방 후 민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김구 선생 암살 배후이자 독재를 휘두른 이승만에 대해 극단적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김시현은 재판에서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 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 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질타했다.

그는 “(6·25)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1953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1960년 4·19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시국사범 제1호로 석방되었다. 유시태는 "그때 권총이 발사됐더라면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robi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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