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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서민의 어쩌면]눈물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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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보였던 반응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습관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기생충학과에서 조교를 하던 20대의 어느 날, 교수님은 실습이 끝난 뒤 남은 기생충들을 모두 모아오라고 하셨다. 난 각 실습실을 돌면서 접시에 꿈틀거리는 하얀색 벌레들을 모두 담아 교수님에게 보여드렸다.

경향신문

“이게 뭐야? 다 모아오라고 했는데 이것밖에 안돼?”

접시를 본 교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셨다.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모은 건데요.” 내 말에 교수님은 더 화를 내셨다. “내가 실습실 한 군데에서 본 것도 이것보다 많아!”

그러면서 내가 귀찮아서 버린 것처럼 말씀을 하셨다. 기생충은 원래 나누어져 있으면 많아 보이지만, 모아놓으면 얼마 안돼 보이기 마련, 야단을 듣고 있자니 억울함이 폭풍처럼 밀려왔고, 곧 내 눈에선 눈물이 났다. 나중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30분가량을 더 울었던 것 같다. 누구나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인지라, 난 누군가가 울면서 말을 하면 그게 진실일 거라고 믿게 됐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난 눈물이 진실일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다고 믿었다. 심지어 지난 지방선거 때 “국민이 미개하다”는 아들의 발언 때문에 사과를 하던 정몽준의 눈물도 난 진심이라고 믿었다. 하기야, 아들로 인해 자신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이랬던 나로 하여금 눈물을 믿지 않게 해주신 분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세월호 참사 후 한 달여가 지난 5월19일,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대통령의 눈물에 많은 이가 감동했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다. 대국민담화 이후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들을 철저히 피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하던 김영오씨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고, 대통령의 국회 연설 때 잠깐이라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국회 옆에서 노숙을 한 유족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지나갈 때 유족들이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했음에도 말이다. 그 결과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구조작업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그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어렵사리 통과됐지만, 정부와 여당은 특위 활동을 오히려 방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책임자 처벌은 됐을까? 당시 구조작업을 총괄했어야 할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이 인천시장 후보로 공천을 받고 당선되는 등 책임있는 자리에 있던 이 중 처벌된 이는 없다시피 하다. 궁금해진다. 대통령이 흘렸던 눈물은 진짜였을까? 혹시 눈에서 땀이 났다든지, 콧물이 역류해 눈으로 간 것이 아닐까? 아니면 좌파들의 주장처럼 50초간 눈을 깜빡이지 않아서 눈물이 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난 그 이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 덜컥 의심부터 한다.

경향신문

“나는 수영을 하기 때문에 건조한 피부여서 얼굴이 붉은 상태였다. 그래서 병원을 가게 됐다. 피부 관리를 받음과 동시에 비타민에 대한 처방을 의사 선생님이 해줬다.”

지난달 27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영웅 박태환이 기자회견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박 선수는 노화방지 전문병원을 찾아 근육강화제로 쓰이는 테스토스테론 제제를 주사로 맞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의사에게 주사가 문제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으며, 도핑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과거의 나였다면 고의성이 없었다는 박태환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수영에서 이룰 것을 다 이룬 마당에 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남성호르몬 제제를 투여한단 말인가? 어쩌면 난 괜한 주사를 놔줌으로써 박태환의 올림픽 출전을 막을 뻔한 의사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 덕분에 단련된 내 마음은 박태환의 모든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20대 중반의 젊은 선수가 노화방지 병원에 가는 게 의심스러웠고, 처음에는 척추교정을 위해 주사를 맞았다고 했다가 기자회견 때는 ‘피부 트러블 때문’이라고 말을 바꾼 것도 이상했다.

또한 내분비내과를 전공한 의사가 테스토스테론이 금지약물인 줄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되거니와, 도핑에 걸릴까봐 평소 감기약조차 먹지 않는다는 박태환이 의사가 놔주는 주사를 성분도 모른 채 맞았다는 건 의심을 해봄직하다. 물론 이렇게 박태환을 의심하는 내 자신이 너무하다 싶기도 하다. 그가 한국 수영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던 때 기뻐서 깡충깡충 뛰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덜컥 미안해진다. 태환아, 의심해서 미안하구나. 이게 다 대통령님 때문이란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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