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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유학 가는 의친왕, 47세 흥선대원군 사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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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1877~1955)의 청년 시절 사진이 발견됐다.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유학 가기 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양상현 순천향대 건축학과 교수가 1일 3·1절을 맞아 ‘그리피스 컬렉션’ 근대 한국 사진 자료 중 대한제국 황실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피스 컬렉션’은 <은자의 나라 한국>의 저자 윌리엄 그리피스가 평생 모은 한국 자료다. 그는 미국 뉴저지 주립 럿거스 대학교에 이 자료들을 기증했고 양 교수는 이를 분석해 지난해 12월 한국근현대사학회에서 발표했다.(경향신문 2014년 12월 18일자 1·22면 보도) 후속 연구를 공개한 양 교수는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되는 의친왕 이강의 개화 시기의 열정을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말했다.

이강은 미국에서 유학생 시절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그는 1919년 일진회에서 활동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동단(大同團)과 협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기차로 평양을 거쳐 만주 안둥(현재 랴오닝성 단둥)에 도착했지만 일본 경찰에 발각돼 송환됐다. 이후 여러 번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배일 정신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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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이강이 1899년 미국으로 유학가면서 가지고 간 ‘비지팅카드’로 추측된다.


사진 형식은 ‘비지팅카드(Carte de Visite)’로 메이지 시대에 활동했던 일본의 사진가, 마루키 리요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양 교수는 “비지팅카드는 1800년대 중반 이후 자기 초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명함처럼 주고받았던 문화”라며 “의친왕 이강이 미국으로 유학가면서 가져간 게 아닌가 추측된다”고 말했다.

의병 처형 관련 기록물도 발견됐다. 3·1운동 직후 의병을 총살하는 사진은 이미 공개됐지만 ‘어떻게 일본은 한국인 혁명가들을 처형하였는가’라는 제목의 글은 독립운동 당시의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 기록은 3·1운동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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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의병을 총살하는 사진.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84쪽에 실려 있다.


“한국의 혁명(3·1운동)은 평화적 성격으로 어떠한 폭력적 행동도 금지된 운동이었다. 그들은 싸울 수 있는 무기도 없었고 어떠한 한국인도 사냥 엽총 하나 조차 소지하지 않았다. 3월 1일, 남자, 여자, 학생 등 3백 만 명의 한국인이 한국의 거리로 나와 독립을 외치는 시위를 시작했다. 한국 대도시의 광장들마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유일한 무기는 선언문일 뿐이었다.”

‘상하이, 3.30 일자’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는 “한국의 시위는 더욱 커지고 있어, 32,000명이 투옥되고,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10 만 명이 죽거나 상해를 입었다. 교회와 학교,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고 되어 있고 ‘상하이, 4.12 일자’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는 “일본은 한국에서 대학살을 시작했다. 서울에서만 무장하지 않은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단 세 시간 정도 시위하는 동안 죽임을 당하였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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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발견된 기록물.


양 교수는 “이승만이 1919년 4월 워싱턴 콘티넨탈 트러스트 빌딩에 연 구미위원부가 있었는데 당시 구미위원부에서 보낸 자료가 아닌지, 이 기록물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대원군의 사진도 발견됐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47세로 우리가 흔히 보던 60대의 사진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다. 이 사진 속 대원군은 5개의 ‘병부주머니’를 차고 있는데 병인양요 당시 군대의 동원을 지휘했다는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부’는 조선시대에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부신(符信)으로 발병부(發兵符)의 준말이다. 이 병부는 지름 7.5㎝, 두께 0.6㎝의 둥글고 납작한 나무패로 색깔은 흑색인데 글자를 쓴 나무패를 2조각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반원형의 목판 우반부(右半符)는 관찰사·절도사·제진이 보관하고 좌반부(左半符)는 궁중에서 보관했다.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 임금이 교서와 함께 좌반부를 내리면 지방관은 이것을 우반부와 맞추어보고 틀림없다고 인정될 때 군대를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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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 당시 흥선대원군의 모습.


그리피스는 “군부지휘관으로 지위를 나타내는 장식을 가슴에 달고 있으며 왕의 증표(부신)를 담은 주머니를 가슴 띠에 차고 있다”며 “이 관리는 자국인 기독교의 말살을 명했다”고 적었다.

개화기 지식인들의 사진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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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의 사진.


어린 시절의 서재필, 청년 시절의 박영효의 사진은 처음 발견됐다. 김옥균의 채색사진도 처음 발견됐다. 양 교수는 “사진은 역사적 사실을 시각적으로 확인해주는 중요한 자료”라며 “앞으로 구체적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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