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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인터뷰] 당나라 시인들은 '잿더미 나라'에서 眞珠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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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고려대 교수

조선일보

중국, 당시의 나라|김준연 지음|궁리|650쪽|2만8000원

김준연(45)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박사 학위를 받은 2001년부터 방학마다 배낭을 메고 중국 답사를 다녔다. 짧게는 4박 5일, 길게는 보름씩 계속된 그의 중국 여행은 20여차례에 이른다. 하지만 황산(黃山)이나 장가계(張家界)처럼 남들이 좋다고 하는 관광지는 정작 가본 적이 없다.

김 교수의 답사 코스는 이백·두보·백거이·맹호연·왕유·이상은 등 당나라(618~907) 시인들이 쓴 당시(唐詩)의 무대들이다. 황암폭포 앞에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는 이백의 시구(詩句)에 감탄하고, 태산(泰山)에 올라가서는 두보가 20대 시절에 썼다고 하는 "언젠가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뭇 산들이 작은 것을 한 번 내려다보리다"라는 구절을 떠올리는 식이다. 김 교수는 "전공자라고 하면서도 실물은 못 보고 도록(圖錄)으로만 작품을 감상한 듯했던 찜찜함을 현지답사를 통해 날려버렸다"고 했다.

서쪽의 둔황(敦煌)부터 동쪽의 태산, 남쪽의 계림(桂林)과 북쪽의 승덕(承德)까지 김 교수의 중국 내 이동거리는 1만2500㎞에 이른다. 중국이 남북으로 5500㎞, 동서로 5200㎞라고 하니 종단과 횡단을 한 번씩 하고도 남는 거리다. 10여년에 걸친 김 교수의 시(詩) 여행이 '중국, 당시의 나라'로 출간됐다.

여름과 겨울방학에 답사를 다니다 보니, 무더위에 땀 흘리거나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었던 기억이 유난히 많다. 덜컹거리는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왕유가 남긴 시의 무대가 됐던 향적사를 찾아가고, 태산 정상까지 놓인 6000개 계단을 밟다가는 '운명이 고달프다'는 말을 떠올렸다. 열차가 4시간가량 지연되면 짐을 지키느라 화장실도 못 갔고,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합승 택시를 탔다가 강도에게 당하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도 그가 '시 여행'을 포기하지 않은 건, "수천년 중국 역사가 남긴 문화유산 중에서도 당시는 찬란히 빛을 발하는 진주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둑들도 시를 탐낸다'는 기록이 있었을 만큼, 시를 즐기는 저변이 넓었고 그만큼 수준도 높았죠."

남녀 간의 애정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이상은의 시는 지금 읽어도 현대적인 느낌이 들고, 두보의 현실주의와 이백의 낭만주의가 나란히 공존했을 만큼 당시의 세계는 깊고 넓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론이다.

조선일보

김준연 교수가 장계(張繼)의 시‘풍교에서 밤에 정박하다(楓橋夜泊)’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400t짜리 돌에 이 시를 새겨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시비로 등재했다. /이덕훈 기자


당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와 현종의 '개원(開元)의 치'등 당나라는 경제·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현종 말기 안사(安史)의 난 이후 잇따른 전란으로 국토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국가의 불행이 시인에겐 행복'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풍요로웠던 나라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감정의 깊이나 절실함도 커졌을 거예요."

한 해 중국 방문객이 400만명에 이르는 시대라고 하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우리의 중국 여행이 경치 감상과 음식 체험, 발마사지 정도에 머무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그의 책은 중국의 시를 벗 삼아 떠나는 '인문학 여행 가이드'인 셈이다. 김 교수는 "앞으로는 중국의 자연 풍경을 찾아다니며 순수 여행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때문에 미뤄놓았던 황산과 장가계를 그가 볼 날도 멀지 않은 셈이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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