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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다시 서원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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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취업 경쟁에 고사 위기 처한 인문학… 새 옷을 입은 ‘21세기 서원’에 길을 묻다

대학이 공부와 멀어진 역설적인 시대, 서원이 뜨고 있다. ‘21세기 서원’에서는 <논어> <군주론>과 같은 고전을 읽고 토론하며 1년 동안 함께 배운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유형원은 서원이 생긴 이유를 향교의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이나 국립 지방대학이었던 향교가 과거 시험과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자 선비들은 대안으로 서원을 생각해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취업학원으로 변한 대학 바깥의 서원에 젊은이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

아산정책연구원과 아산나눔재단이 2012년 세운 아산서원은 2년간 11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년 내내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교육과정에 호응이 높아 입학 경쟁률이 7 대 1이나 된다. 내년에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소하(昭霞)서원이, 가회동에 건명원(建明園)이 문을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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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서원 재학생들이 서원 인근 경희궁 앞에 모였다. 1년 내내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힘든 교육과정이지만 젊은 학생들의 호응이 높아 입학 경쟁률이 7 대 1이나 된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대학교육 균열 틈새로 화려한 부활

지난 17일 오전 9시30분 종로구 아산서원. 15명의 학생이 모여있는 가운데 이승률 아산서원 교수가 <논어>의 4번째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의(義)란 무엇인가’. 이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라는 물음”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공공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33위)를 했다는 조사 결과를 보여줬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네덜란드인은 ‘관용’을, 한국인은 ‘경쟁’과 ‘성공’을 가장 중시한다.

한 학생이 손도 들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관용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뭘 중시하는 것입니까.” 교수가 반문했다. “우리가 세월호 사고에서 선장의 행위에 대해 분노를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수는 답을 단정하지 않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계속 끌어냈다. “다른 사람을 구하고 살아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세금을 들여서 그런 사람들을 의사자로 선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용적인 사회는 관용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사회다. 어떤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일까.”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이 수업에는 답이 없었다.

왜 다시 서원일까.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아산정책연구원 한국학연구센터장)은 “전통 서원과 근대 대학을 결합해 우리에게 맞는 형태의 교육기관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산서원은 조선시대 서원과 영국의 대표적 지도자 양성 과정인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를 한국 현실에 맞게 재해석해 새롭게 구현하고자 했다. PPE는 옥스퍼드 대학이 1920년대의 고전 중심 교육과정을 현대에 맞게 보완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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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서원 재학생들이 경주 서악서원을 찾아 현장수업을 하고 있다. | 아산서원 제공


■ 동·서양 고전 넘나들며 자유토론

서원과 PPE의 교육과정은 인문교육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서원에서는 사서삼경을 가르쳤고 PPE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가르쳤다. 또 소규모로 이뤄지는 교육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선생님과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아산서원 학생들은 동서양의 고전을 바탕으로 인문교육을 받고 소규모 토론식 수업을 한다. 또 기숙사인 ‘아산학사’에서 10개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한다. 국제적 감각을 기르기 위해 미국과 중국의 싱크탱크 및 비영리기관의 인턴십(20주)을 통해 실무도 배운다.

김 부원장은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가고 세상에서는 인문학의 인기가 높아지는 이상한 상황에서 제대로 인문학 교육을 해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했다.

교육과정은 역사, 동양철학, 서양철학, 정치, 경제, 문예 등 폭이 넓다. 천자문을 외우고 <격몽요결>을 강독하며 플라톤의 <국가>,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토론한다. 수사학, 영화로 읽는 동아시아 문화, 건축의 공간사회학, 서예까지 다양한 수업이 있다.

졸업 논문도 써야 한다. 두 과목 이상 낙제하면 해외 인턴십을 갈 수 없다.

김은중씨(23·고려대 영어영문학과)는 “대학에서는 학점에 신경 쓰느라 주어진 공부, 판에 박힌 공부만 했다”며 “이곳은 소규모 수업이라 교수님에게 바로 피드백을 받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30명이 다같이 생활하기 때문에 동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도 좋은 공부가 된다.

김씨는 “그동안 고전을 많이 읽었지만, 단순히 지식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동료 학생들과 토론하다보니 내 생각을 갖고 책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항상 고개 숙여 인사한다. 김 부원장은 “진정한 인문교육은 인간으로서 아름다움을 키워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입학 시험에서는 토익 800점 이상, 학점 B학점 이상자를 대상으로 추천서와 면접을 통해 다각도로 평가한다. 대학교 3학년 이상, 30세 미만이면 지원 가능하다. 김 부원장은 “처음에는 하나의 실험으로 생각했는데 인문학 교육이 젊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조선시대에 도산서원이 생긴 뒤 여러 군데에 서원이 생기면서 서원운동이 벌어졌다. 새로운 청년 문화, 대학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게 반갑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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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여주의 땅콩농장에서 아산서원 재학생이 농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아산서원 제공


■ ‘한국의 스티브 잡스’ 육성 꿈도 자란다

고려대 철학과 김형찬 교수가 주축이 돼 준비하고 있는 소하서원도 아산서원처럼 차세대 리더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내년 중 종로구 원서동에 개원할 예정이다.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이 하나의 모델이다. 일본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1979년 세운 마쓰시타 정경숙은 일본 정치인, 재계·학계 인사를 배출한 교육기관이다. 김 교수는 “한국에서 리더가 양성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며 “대학은 대중 교육에 치중하는 구조가 됐고 리더를 키우는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아, 리더십 스쿨이면서 동시에 싱크탱크였고 공론을 형성하는 언론 역할까지 했던 조선시대 서원에서 모델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곳은 교육과정을 보다 실제적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이 사회에 필요한 리더라면 정치·경제·국제관계 지식에서 어떤 것을 공부해야 할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실제적 지식이 필요할지 고민 중이다. 또 한국 사회의 큰 변수인 중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논의해보려고 한다. 학기 중에는 주말에 수업하고 방학 때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20~2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할 계획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가 주축이 돼 내년 3월 문을 여는 건명원은 내일을 준비하면서 뛰어노는 울타리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학교나 스펙을 보지 않고 면접만으로 선발한다.

배 교수는 “모두가 스티브 잡스를 원하지만 우리나라 구조상 어렵다”며 “재능은 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람을 한 명이라도 발견하면 9명의 교수가 1년 동안 가르쳐보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뇌과학)·정하웅 교수(물리학), 서강대 최진석 교수(철학), 서울대 주경철 교수(역사), 서강대 서동욱 교수(예술) 등 9명의 교수가 뭉쳐 9개 과목을 가르친다. 교수들은 학생들과 함께 모든 수업에 참여해 학생의 입장에서 토론하고 질문한다. 배 교수는 “철학을 전공한 나도 뇌과학 수업, <도덕경> 수업을 듣고 토론하면서 서로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주 수요일 4시간씩 수업을 듣는다. 교육과정이 끝나면 한 달간 세계일주를 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일정을 짜오면 주양문화재단에서 여행비를 지원한다. 졸업 요건은 까다롭다. 노자의 <도덕경>과 키케로의 <국가론>을 통째로 다 외워야 한다. 교육과정이 끝나면 암송대회를 연다. 배 교수는 “언어가 근면과 정직을 가르쳐준다. 아는 만큼 낭송할 수 있고 매일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29세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다. 40주 일정으로 총 30명을 모집한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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