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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대학도 高校도, 취업축하 현수막 내거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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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더 잘해줄걸" 대학街 톡톡 튀는 문구들]

"회계사님 용돈 분식회계 좀" "축 취업, 불우이웃 도웁시다" "오빠 이제 변리사야, 찡긋"

딱딱했던 옛날 문구 대신 취업난 뚫은 기쁨 맘껏 표현

'대학은 2번 만에 합격, 행시는 3번 만에 합격, 여친은 4번 썸 타다 끝남' '솔로몬의 선택 매번 틀리던 놈이 사시 합격을 ㅠㅠㅠ'

최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교정에 익살스러운 문구의 현수막들이 내걸렸다. 지난달 행정고시 2차 합격자 발표, 이달 중순 사시 합격자 최종 발표, 대기업 공채 최종 합격자 발표가 잇따르면서 등장한 축하 현수막들이다.

마포구 서강대 교정에도 지난주 '섹시 가이 ○○○ 취업을 Respect, 방송국 PD 합격 축하드립니다'는 현수막이 붙었다. 올해 초 학교를 졸업하고 최근 방송국에 취직한 이모(29)씨의 동아리 후배들이 호주머니를 털어 제작한 것이다. 가로 4m·세로 70㎝ 크기의 현수막 양끝엔 환히 웃고 있는 이씨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동아리 회장 이서경(20·신문방송학과)씨는 "힘들게 공부해 합격한 선배에게 추억이 될 만한 선물을 하고 싶었고 한편으론 '우리도 취업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 현수막에 내걸린 이씨는 "국가고시 합격도 아니라 민망하기도 했지만 특별한 선물이라 고마웠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6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캠퍼스에 걸린 변리사 합격 축하 현수막(위에서 둘째).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선배를 축하하기 위해 후배들이 만들어 걸었다. /이기문 기자


취업 전쟁 시대 평범한 언어로는 합격의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어서일까. 국가고시나 취직에 성공한 학생들을 축하하는 개성 만점의 현수막들이 대학 캠퍼스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동안 대학가의 합격 축하 현수막들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로 학교·학과 차원에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고 문구도 '축 ○○대 2014 제51회 변리사 시험 ○명 최종 합격. 전국 2위 ○○학과 ○○○'처럼 천편일률적이었다.

옛 기준으로 본다면 최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캠퍼스에 걸린 변리사 합격 축하 현수막은 거의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다. '변태! 리○○! 사랑해!(요) 호탕! 음탕! 방탕! 오빠 이제 변리사야 찡긋'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이모씨를 짓궂은 삼행시(변, 리, 사)로 축하하는 친구들의 작품이었다.

대학 관계자들은 "3~4년 전부터 합격 축하 현수막 문구가 톡톡 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재치있고 파격적인 문구의 현수막은 캠퍼스 담장을 넘어 온라인상에서도 큰 화제가 된다. 몇 년 전 성균관대에 걸렸던 합격 축하 현수막은 지금도 회자된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 학교 여학생 김모씨를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이 내건 현수막 제목은 '공개구혼'이었다. 현수막에는 김씨의 사진과 함께 '몸매 :비욘세 꿀벅지, 피부:이효리 구릿빛'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고, 그 옆에 빨간 글씨로 '특이사항: 제○○회 사법고시 합격'이라고 쓰여 있었다. 사시 합격을 축하하는 동시에 애인도 구해주겠다고 발벗고 나선 친구들의 아이디어가 돋보인 현수막이었다.

'축 취업 ○○○!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은행 110-056-580*** 이○○' '○○○ 사무관님, 이제 소고기 회식 잡으면 되죠?'처럼 공개적으로 덤터기를 씌우는 현수막도 있다. 사법고시 합격 현수막 옆에 일부러 '나도 국가고시 합격 운전면허 1종 보통 수석 합격'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이라는 자학성 현수막을 나란히 달기도 한다. '이런 씨파(CPA·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비속어로 표현한 것)! 저런 놈도 합격하는데!''회계사님, 당신의 용돈을 엄마 몰래 분식 회계 좀'처럼 직종의 특징을 재치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한 대학 관계자는 "갈수록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평범한 현수막으로는 합격과 취업의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게 아니겠느냐"며 "남들 시선보다 자신들의 감정과 느낌을 중시하는 신세대식 표현법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현수막을 보며 마냥 웃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반응도 있다. 경희대 이모(25)씨는 "현수막은 대부분 사시·외시·행시 등 고시 합격자를 축하하는 것이어서 구직하는 입장에서 기가 죽는다"고 말했다.

이색 축하 현수막 대부분은 학생들이 학교 측의 승인 없이 자유롭게 설치하고 일주일쯤 지난 후 스스로 철거해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대학 관계자는 "엄밀하게 보면 불법 현수막이지만 미관을 크게 해치거나 민원이 생기지 않는 이상 먼저 철거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송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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