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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바람과 물, 억겁의 시간을 품은 ‘원시’ 왕피천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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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생태관광 탐방

하늘은 쾌청, 산은 울긋불긋, 멀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은 하얬다. 사방팔방 눈 닿는 데까지 사람은 없었다. 지난 14일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3리 굴구지마을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걸었을까. 세상에서, 도시에서 내 몸이 아주 멀리 와 있다고 느끼는 순간, 왕피천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한반도 유일의 자연하천.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왕피천은 고적하고 원시적이었다. 환경부와 경북 울진군이 갖춰 놓은 안내판과 밧줄만이 이 길이 얼마 되지 않는 생태관광 탐방로임을 알려주었다. 단풍과 햇빛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숲길과 물길은 혼자 걸을 때, 두서넛이 도란거리며 걸을 때 각기 다른 맛을 선사한다.

발원지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금장산. 왕피천은 울진군 서면~근남면을 따라 65.9㎞를 흐르고 광천, 매화천과 만나 동해에 합류한다. 울진군과 영양군에 걸쳐 있는 왕피천 생태경관보전지역은 102.84㎢에 달한다. 환경부가 지정한 국내 38개 생태경관보전지역 중 가장 크다. 다른 것을 다 합친 넓이의 28.4%나 된다. 산양·수달·말똥가리·구렁이·삵부터 산작약·고란초까지, 깃들여 사는 멸종위기 동식물도 다양하다. 숲길 곳곳에서 멧돼지가 지나간 흔적과 고라니, 산양의 배설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왕피천에서는 운이 좋으면 수달이 남긴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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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군 왕피천 계곡에는 화강암이 오랜 세월 물과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용머리바위가 있다. 용이 아가리를 벌린 형상인 용머리바위는 굴구지마을에서 시작하는 왕피천 탐방로 2코스를 걷다 보면 만나는 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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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단풍을 다 담아낸 웅덩이 ‘용소’

강을 따라 올라가며 백사장을 걸었다. 흰색 바위밭이 군데군데 보였다. 오랜 시간 바람과 물에 풍화·침식된 화강암 바위들은 햇빛을 받아 눈이 부셨다.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상천동에서 서면 왕피리 속사마을까지 5㎞의 길에는 흰바위 무더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굽이굽이 빠르게 흐르던 물이 갑자기 멎었다. 용소(龍沼)였다. 풍화된 바위 사이에 만들어진 웅덩이엔 왕피천 물이 깊이 숨 죽인 채 채워졌다. 멈춰 있는 듯한 3~4m 깊이의 물은 바닥까지 투명했다. 하늘과 단풍도 그 속에 비쳤다. 자연환경해설사를 하고 있는 주민 도민호씨는 “스킨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들어가보니 7~8m 정도 되는 곳도 있다”며 “안전 문제 때문에 용소 안쪽으로는 탐방로를 만들 수 없고, 여기서부터는 산길을 따라 우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탐방로가 완성돼 있지 않은 소나무숲을 올랐다가 다시 탐방로를 찾아 왕피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나오자 ‘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물이 멈춘 듯한 작은 연못을 왜 용소라 부르는지 금세 알아챘다. 사람이 다가가기 힘든 천변 한쪽에 아가리를 잔뜩 벌린 큼지막한 흰색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용머리바위. 급하게 흘러내리던 물에 수천, 수만년 동안 깎이고 부딪혀온 바위가 만들어낸 왕피천 최고의 비경이다. 여기저기 기암 속에서 굽어 자라는 나무들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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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 2코스의 거북바위 조망대서 본 왕피천 주변 풍경. | 왕피천에코투어사업단 제공


■ 자연환경해설사와 함께하면 금상첨화

왕피천 탐방로는 삼근리에서 시작하는 1코스, 기자가 이날 발걸음을 시작한 구산3리 굴구지마을에서 왕피리 속사마을까지 가는 2코스만 완성돼 있다. 환경부와 주민들은 1개의 탐방 코스를 더 만들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왕피천 탐방로 1코스는 삼근리에서 시작해 왕피분교를 거쳐 왕피리로 향하는 길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광산과 화전민들이 살던 터를 보면서 왕피천을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2코스는 구산3리 굴구지마을에서 출발해 상천동을 거쳐 거북바위에서 다시 구산3리로 돌아가는 길이다.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는 오지 마을 굴구지의 펜션에서 묵은 뒤 천천히 강가를 따라 걷는 2코스에서는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과 왕피천의 비경인 용소를 볼 수 있다. 앞으로 탐방로가 조성될 3코스 한티재는 옛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지나던 길로, 옛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풍수지리를 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탐방 중에 무료로 하는 자연환경해설사의 가이드를 받으려면 홈페이지(www.wangpiecotour.com)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서도 아직은 자연환경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편이 낫다. 왕피천 내 생태경관보전지역에는 민가도 거의 없고, 길이 나 있는 곳도 많지 않다. 외부인이 길을 잃으면 조난을 당할 수 있고,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아 도움을 청하기 어려운 곳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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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피천의 용소(龍沼)는 불영사 건축 때 용 한 마리가 승천했다는 얘기가 담겨 있다.


■ 지역주민들과의 ‘공존’

왕피천은 이렇듯 일반인들이 아직 낯설어하는 에코투어(Eco Tour·생태관광)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 왕피천을 에워싼 마을의 주민들로 구성된 에코투어사업단은 현재 하루 탐방객 수를 1코스는 30명, 2코스는 8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대중교통도 뜸하고 가는 길도 좁아 사업단이 셔틀버스를 운영 중이다. 단체관람객을 태운 버스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개발’ ‘인공’이란 말과 상극의 자리에 ‘불편함’이 있음을 체감하는 곳이다. 6~7시간이 걸리는 탐방 중 1인당 1만원을 내면 유기농 점심식사를 제공받고, 6000원을 내면 시골밥상을 맛볼 수 있다.

에코투어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주민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생태보전지역을 보호하고, 자연환경해설사로 활동하며, 때때로 위험을 감시·통제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왕피천을 끼고 92개의 일자리가 유지되는 것은 생태관광의 맛과 지속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다. 왕피천의 생태관광 모델을 만들 때 참가한 녹색연합 서재철 전 자연생태국장은 “왕피천이 생태적으로 건강한 보호구역으로 유지되면서 시민들이 규칙을 따라 탐방하고, 그간 소외됐던 지역 주민들의 수입에 도움이 되는 공존의 모델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시외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굴구지마을은 성수기엔 주민들이 운영하는 펜션·민박 예약이 꽉 차기도 한다. 새로 지어 깔끔한 민박은 하루 3만~4만원에 이용할 수 있다. 산림청이 지원해 지은 마을 펜션 수익은 주민 전체에게 돌아가고 있다.

왕피천 탐방길에 곁들여 볼 만한 관광지도 주변에 많다. 왕피천·광천·매화천이 만나는 곳에 천연 석회암동굴인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이 있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 덕구온천과 백암온천, 불영계곡, 영양군 수비면의 반딧불이 생태공원도 가깝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와 북면 두천리의 금강소나무숲길은 사전예약을 해야만 둘러볼 수 있다.

▲ 가는 길

대중교통으로 왕피천에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울진에 도착해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서울에선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가 출발한다. 울진읍내에서 서면 삼근리까지는 버스로 20분 정도 걸린다. 삼근리에서 내릴 수 있는 버스는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80분 간격으로 있다. 직접 차를 몰아 왕피천에 가려면 서울에선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통해 영주까지 가서 36번 국도를 타거나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강릉까지 가서 동해·삼척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면 4시간 정도, 영동고속도로로 가면 5시간 정도 걸린다. 36번 국도는 구불구불 코너가 많고, 경사도 심해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시간이 좀 더 걸려도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부산이나 울산에서 울진을 갈 때는 동해대로를 거치면 된다.


<글·사진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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